철학적 토론의 가치
상태바
철학적 토론의 가치
  • 관리자
  • 승인 2007.12.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유경 이야기

1. 철학 토론

 우리들은 곧잘 쓸 데 없는 이론을 희롱할 때가 있다. 아무런 건설적 의미도 없고 사실적 근거도 없는 공허한 말장난을 할 때가 있다.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그것이 어떻게 생겼다느니 어떤 작용을 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좋다느니하며 말을 늘어 놓는다면 이 어찌 어리석고 부질 없는 짓이 아닐까? 그런데도 진리를 모르고 사물의 실상에 어둔 범부들은 곧잘 그런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론 전개라는 말 장난이 또한 그런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도 여전히 그런 철학 토론이 유행하였던 모양이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아니면 유한인가, 또 공간적으로 유한인가, 무한인가? 영혼과 사람의 몸은 같은가, 다른가? 사람은 죽어도 존속하는가, 아니면 죽으면 그만인가? 이런 논의들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부처님께 물어온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 날 우리들에게도 이런 의심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불법에 접근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이론에 빠지는 것을 희론(戱論)이라 하여 멀리하셨다. 있지도 않은 환상을 놓고 공론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환상을 이러쿵저러쿵 하느니 보다는 환상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환상적인 결박에서 해탈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아시는 부처님으로서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중생들이 문제삼고 있는 이 세계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이 당초부터 망견에 근거한 것임을 너무나 명백히 보시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이 있을 때 부처님은 대답을 안 하신다. 그 대신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알게 하고 온갖 환상적인 미망에서 벗어나 해탈의 길을 가르치신다. 그런데 해탈을 듣고 '해탈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어디로 가는가' 의심한다. 부처님 때의 사람들도 역시 그랬었다.

 아함경 중의 '바차구타화유경'에 이 사이의 사정이 잘 나타나 있고 부처님의 명쾌한 대답이 보인다. 여기서 미망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과정을 불로 비유하여 우리의 미망을 깨뜨려 주는 것이다. 이하에 줄거리만 더듬어 본다.

2. 여래는 해탈자

 세존께서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 한 번은 바차라는 수행자가 찾아와 물었다. 

 "세계는 영원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세계가 영원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세계는 허망한 것입니까?"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