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十牛圖] 소를 주제로 한 그림(牛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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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우도十牛圖] 소를 주제로 한 그림(牛圖)
  • 손태호
  • 승인 2024.02.2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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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소

고구려의 소 그림

우리 민족은 고대부터 소를 매우 신성시해, 제천행사나 순장용으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물이 소였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점을 칠 때는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남은 소뼈로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또한 농경 생활을 주축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소는 농사에 필수적인 노동력이자 일상생활의 귀중한 운송 수단이었다. 시골에서 소는 농토를 제외하면 자산 1호였기에 “소를 팔아 대학을 보냈다”라는 말이 높은 교육열을 대변하기도 했다. 소는 살아서는 노동력과 우유를 제공하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제공한다. 그리고 뼈는 공예품으로 사용됐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집에 사는 식구(하인이나 종)란 뜻으로 ‘생구(生口)’라 부르기도 했고, 정월 대보름에는 사람과 똑같이 오곡밥을 먹이기도 했다. 이처럼 소는 우리 생활과 매우 밀접했기에 그림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소가 등장하는 최초의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다. 

[도판 1] <견우직녀도>, 408년, 덕흥리 고분 전실 남쪽 천장 부분

평양 덕흥리 고분 천장에는 유명한 <견우직녀도>[도판 1]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위에서 좌측 아래로 푸른빛의 대각선으로 강처럼 그려진 부분이 은하수고, 그 왼쪽에 소를 몰고 있는 견우가, 오른쪽에는 직녀가 서 있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지만 결국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다. 그래서 그림도 ‘소는 모는 사람’이란 뜻인 견우(牽牛)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직녀와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다. 무덤은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는 공간이므로 <견우직녀도>는 고분벽화에 잘 어울리는 주제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이 이런 그림을 남긴 이유가 아니었을까.

[도판 2] <외양간>, 안악 3호분 안방 동쪽 곁방 남벽

덕흥리 고분보다 더 시기가 앞서는 안악 3호분에도 외양간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소 네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엎드려 있다[도판 2]. 외양간에 소가 여러 마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풍족한 생활을 한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망자가 사후에도 경제적으로 풍족한 곳에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바람이 녹아 있다. 

이처럼 오래전 고구려 고분벽화 그림에서부터 소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우리 민족에게 소가 얼마나 중요한 가축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소뿔의 모습은 중국 물소와 달리 조선시대 소 그림의 뿔 모양과 흡사하다. 이를 통해 한국 소의 모습은 원래부터 중국 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소 그림

소가 신성하고 하늘과 이어진다는 이미지는 고려시대에도 전해져 불교국가였던 고려의 불화와 조각에도 등장한다. 미국 보스턴박물관 소장 <치성광여래강림도>[도판 3]에는 북극성을 신격화한 치성광여래가 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여러 보살과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도판 3] <치성광여래강림도>, 13세기 말~14세기 초, 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

‘치성광여래’는 북극성인 치성광여래를 한복판에 두고, 그 주변의 보살들에게 각기 별자리 이름을 붙여 배치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성광여래 양옆으로 해를 상징하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달을 상징하는 월광보살(月光菩薩)을 포함한 28개의 별자리가 의인화된 보살로 표현됐다. 치성광여래는 소가 이끄는 수레에 올라타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소가 복과 덕을 전해주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이런 도상은 경천사지 10층석탑 ‘소재회’ 부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고려시대에 이런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힌두교에서도 시바(Shiva)의 탈 것인 소를 ‘난디’라 부르며 매우 신성시해 시바의 사원이나 신상 앞에 반듯이 소의 조각을 세우는 것과 유사한 인식이다. 

14세기에 제작된 이 불화는 고려시대의 천문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이 작품을 모본으로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치성광여래강림도>(선조 2년, 1569)가 그려져 불교회화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불화다. 

 

조선시대 소 그림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소에는 농경사회의 상징성과 더불어 다양한 의미가 추가됐다. 아무런 불평 없이 농사일을 거드는 우직함과 근면함, 그리고 태평함과 은둔함의 상징성이 더해졌다.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은 조선 중, 후기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대부분 여유와 한가함, 은일과 순수함을 상징하는 그림들이다. 먼저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소 그림의 일인자라 손꼽히는 양송당 김시(金禔, 1524~1593)와 그의 손자 김식(金埴, 1579~1662)의 소 그림을 살펴보자. 

[도판 4] 김시, <황우도(黃牛圖)>, 16세기, 서울대박물관 소장

김시의 <황우도(黃牛圖)>[도판 4]는 특이하게도 발걸음을 옮기는 소의 뒷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엷은 먹빛으로 부드럽게 소의 양감을 표현하면서 초승달 같은 뿔과 발굽, 꼬리 일부분에 진한 먹으로 악센트를 줬다. 푸짐한 소의 뒷모습에서 경제적 여유와 자유로움이 느껴지지만 정작 화가 김시의 삶은 그다지 평온하지는 못했다. 

김시는 당대 세도가 연안(延安) 김씨(金氏)의 좌장인 좌의정을 지낸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아들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하지만 14세 되는 1537년(중종 32) 그의 혼례 날에 아버지 김안로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됐다. 그 뒤 그는 과거와 정치에 대한 모든 관심을 끊고 오직 서화의 길로 매진해 뛰어난 화가가 됐다. 그의 그림 실력은 당대에도 인정받아 선조 대의 삼절(三絶)로 ‘그림은 김시, 문장은 최립(崔岦),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이 꼽혔다. 

[도판 5] 김식, <고목우도(古木牛圖)>, 17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시의 손자인 김식도 할아버지 그림 실력을 이어받아 뛰어난 소 그림을 남겼다. 그의 <고목우도(古木牛圖)>[도판 5]는 조선시대 소 그림 중 수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이다. 화면 왼쪽에 고목이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소 가족이 세 마리 있는데 엄마 소는 튼실한 엉덩이를 보이며 앞을 향하고 있다. 엄마 소의 엉덩이 아래 송아지 한 마리가 젖을 빨고 있는데 크기로 보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송아지다. 그 옆에 송아지를 바라보는 소는 아빠 소처럼 보인다. 새끼의 먹는 모습만 봐도 뿌듯한 듯 젖을 잘 먹고 있는지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소들은 코뚜레와 멍에도 없어 아주 자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목가적인 풍경의 그림이다. 

고목은 먹의 강약을 줘 밋밋하지 않고, 옹이와 아래쪽 노출된 뿌리도 표현돼 사실성이 높다. 그 아래 소들이 배치돼 소와 나무가 대비되는데 늙은 고목과 젊은 소, 굵기가 가는 나무와 살집이 튼실한 소 등의 대비가 일품이다. 소의 표현은 할아버지 김시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뿔 형태, 눈동자 흰 여백, 코의 ‘X’ 표현, 스타킹을 신은 듯한 발목 표현 등이 할아버지 김시로부터 이어진 표현들이다. 

[도판 6] 이경윤, <기우취적(騎牛吹笛)>, 17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16세기 후반의 소 그림 중에는 고사인물도로 유명한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소 그림이 볼만하다. 이경윤의 <기우취적(騎牛吹笛)>[도판 6]은 고목 두 그루 아래에 걸어가던 소 두 마리가 잠시 서로를 쳐다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왼쪽 소 위에는 동자가 적(笛)을 불고 있는데 소의 모습이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소의 모습은 천진한 동자와 등치가 되며 평화로움과 순수함이 느껴지는데 순한 조선인들의 심성과 닮은 그림인 것 같다. 

[도판 7] 정선, <청우출관(靑牛出關圖)>, 18세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장

이런 순하고 소박한 소 그림 경향은 조선 후기로도 이어진다. 조선의 화성 겸재 정선(鄭歚, 1676~1759)도 멋진 소 그림을 <노자출관(老子出關)>과 <청우출관(靑牛出關)>[도판 7]으로 남겼다. 중국의 노자(老子)가 득도한 다음 호인(胡人)들을 교화하기 위해 몰래 함곡관(函谷關)을 나서는데 이때 윤희(尹喜)라는 관리가 노자를 알아보고 간절히 도를 물으니 감복한 노자가 도덕경(道德經) 오천언(五千言)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때 노자가 탄 동물이 바로 소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조선의 화가들도 자주 그렸던 소재였다. 

[도판 8] 정선, <사문탈사(寺門脫蓑)>, 18세기, 간송미술관 소장
[도판 9] 정선, <기우취적>, 18세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장

또 정선은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어느 겨울날 절에 방문했던 이야기를 그린 <사문탈사(寺門脫蓑)>[도판 8]에서도 이이가 소를 타고 온 모습으로 그렸으며, <기우취적>[도판 9]에서도 푸른 옷을 입은 아이가 피리를 불며 소를 타고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정선에게 소는 깨끗하고 속세에서 벗어난 인물이 타고 다니는 동물, 즉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평화로움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판 10] 최북 <기우귀가(騎牛歸家)>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후배 화가 최북의 <기우귀가(騎牛歸家)>에서도 정선의 <기우취적>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최북의 <기우귀가>[도판 10]의 소는 색깔이 진한 검은 소인데 길고 뻣뻣해 보이는 털, 발달한 근육으로 아이가 타기엔 꽤 거칠어 보인다. 큰 소가 고개를 들고 힘차게 걸음을 내디디며 얕은 물가를 건너가고 있지만 아이의 얼굴에 불안함은 찾아볼 수 없다. <기우귀가>는 정선의 <기우취적> 비슷해 보이지만 그 제목에서 불교적 색채가 풍기는 작품이다. ‘길들인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騎牛歸家)’는 제목의 의미는 소를 찾아 깨달음의 세계로 돌아가는 심우도(尋牛圖)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최북의 호인 ‘호생관(毫生館)’의 뜻을 생각하면 더욱 짙어진다. 호생의 뜻은 ‘붓끝에서 보살이 태어난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에 최북은 불교적 소양을 갖춘 화가라 생각된다. 그에게 소는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이자 자신의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 안식과 평온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판 11] 김홍도, <논갈이>(보물),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세기 후반,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완전히 한국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소의 모습을 표현한다. 보물로 지정된 김홍도 《풍속화첩》 중 <논갈이>[도판 11]는 김홍도 풍속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X’ 구도로 운동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그림이다. 봄철 겨우내 얼었던 밭을 갈고 있는 농부와 쟁기질하는 소를 그린 작품이다. 고개를 들고 있는 두 마리 소의 모습과 바지를 걷어 올린 채 열심히 일하는 농부가 어우러지며 활기찬 농촌의 봄 풍경을 잘 그려냈다. 

[도판 12] 김홍도, <경작도>(보물), 1796년,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또 김홍도는 1796년에 그려낸 『병진년화첩』에서 문인들의 취향이 더 짙어진 <경작도>[도판 12]를 남겼다. 특별한 것 없는 풍경이지만 까치집이 있는 마른 나뭇가지의 고목 아래에 노인 두 명이 한담을 나눈다. 여러 모양의 자갈돌, 소와 쟁기질하는 농부를 가만히 바라보는 삽살개까지 적절히 배치돼 생동감이 느껴진다.

김홍도는 <경작도>에서 실생활의 모습을 기존 평범한 풍속화를 벗어나 실경산수화 영역으로 확대했다. 조선 농촌의 서정적인 한 장면을 매우 운치 있으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김홍도의 소 그림들은 뿔의 모습이나 얼룩진 엉덩이, 쟁기 도구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농우(農牛)로, 조선 사회의 근간인 농촌에서 인간과 함께 애쓰는 고마운 존재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우리 회화에서 등장한 소 그림 여러 점을 살펴보았다. 이런 소 그림의 전통은 근현대까지 이어져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등 많은 작가가 소 그림을 남겼다. 우리 민족에게 소는 정말 특별한 동물이며 떨어질 수 없는 가축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소는 신령스럽고 고귀한 인물이 타는 영험한 동물이자, 아이처럼 순수하고 평화로움을 상징하며 우리 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동반자 같은 고마운 존재로 인식됐던 것이다. 

우리 옛말에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牛步千里)’라는 속담이 있다. 소처럼 느릿느릿하게 걸어도 꾸준히 걷다 보면 결국 천 리까지 갈 수 있다는 소의 근면함을 빗대 속담이다. 새봄, 새 학기, 새 농사가 시작되는 3월. 우리 모두 소의 우직함을 본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히 발걸음을 내디뎌 저 멀리 소망이라는 언덕까지 씩씩하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손태호  
동국대 미술학 박사. (사)한국문화예술조형연구소 학술이사.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현대적 응용함으로써 대중과 함께하는 미술사 연구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조선 및 근대 한국회화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저술과 강연을 한다. 문화예술전문 ㈜인더스투어를 운영하며 국내외 불교유적답사 및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저서로는 『나를 세우는 옛 그림』,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 『조선 불상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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