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시체를 묻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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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B급 스님들] 시체를 묻는 스님들
  • 김성순
  • 승인 2023.08.2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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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전염병으로 죽은 자 거둔, 매골승埋骨僧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작자·연대 미상의 병자호란을 소재로 한 몽유록계 한문소설로 매골승 청허선사가 주인공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도(江都,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 함락돼 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했다. 청허선사가 수많은 시신을 거두기 위해 연미정(燕尾亭) 기슭 움막에 지낼 때, 꿈에서 귀신이 된 여인들의 억울한 하소연을 듣게 된다는 내용이다. 

고려시대의 매골승

매골승(埋骨僧)이란, 말 그대로 ‘뼈를 묻는 승려’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에서 승려나 단월(檀越, 시주하는 사람)들의 장례 과정을 맡아 처리하던 승려’를 말한다. 이들은 매장의 경우 시신을 땅에 묻거나, 화장으로 장례를 치를 때는 다비(茶毘)와 뼈를 추리는 습골(拾骨) 등을 담당했다. 

고려 말 14세기에 활약했던 승려 신돈(辛旽)이 매골승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골승은 적어도 14세기 이전부터 고려 사회에 있었던 승려의 직능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 등의 단월들이 사찰에서 병을 치료하거나, 임종 전에 머무는 일이 많았기에 의술을 갖춘 승려가 필요했다.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풍수와 장례 의식에 통달한 매골승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나 왕족뿐 아니라 문벌귀족들 사이에서도 화장하는 것이 유행했다. 따라서 다비와 남은 뼛조각을 수습해 매장하는 절차를 주관할 승려가 필요했다. 

고려시대 금석문을 분석한 연구를 보면, 다비 이후에 수습된 유골은 망자(亡者)가 임종한 사찰에 안치하고 140여 일간 조석으로 의례를 치렀다. 이후에야 망자의 선영(先塋)에 매장했다. 고려 사찰의 매골승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담당했던 승려이지 않을까? 

승려들은 빈자의 구제를 위해 활동했던 대비원(大悲院)에서도 활동했다. 개경(開京)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있었던 동서(東西) 대비원은 관곡, 의복, 의약으로 병자와 빈자, 늙은이, 굶주리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보호했던 국기기관이었다. 오늘날의 병원, 고아원 내지 양로원의 기능을 담당했다. 

대비원의 구제사업 중 병자의 치료, 전염병이나 기근 등으로 민간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는 작업에 의술을 지닌 의승(醫僧)이나 매골승이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비원의 설립 이념이 불교적 자비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고려불교의 친국가적 성격에 비춰 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매골승

조선은 유교를 국가통치의 기본 이데올로기로 표방했는데, 조선 중기까지는 매골승이 존재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찰에 소속된 승려로 장례와 매장을 담당했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의 매골승은 급료를 지급받는 준관원(準官員)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변화 과정을 살펴보자. 

고려의 유습인 동서 대비원을 존속시킨 조선 정부는 1414년(태종 14)에 명칭을 동서 활인원(活人院)으로 바꿔 계속 운영했다. 기존의 관원 이외에 의원(醫員), 의무(醫巫), 그리고 매골승을 배치했다. 매골승은 무격(巫覡)과 함께 빈민의 구휼, 병자의 치료와 간호, 시신 수습, 그리고 세종 대에는 한증승(汗蒸僧)이라는 이름으로 한증소(汗蒸所)를 운영하는 등의 업무를 나눠 맡았다.

활인원은 다시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活人署)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아울러 태종 대에 시신 처리를 전담하는 매치원(埋置院)이라는 기관도 만들어졌지만, 이후 사라지고 동서 활인원이 시신의 처리를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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