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고영민 ‘너와 동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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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고영민 ‘너와 동침을 한다’
  • 동명 스님
  • 승인 2022.05.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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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화순 운주사 와불
화순 운주사 와불

너와 동침을 한다
_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히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리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2005)

화순 운주사 전경
화순 운주사 전경

[감상]
시인은 화순 운주사행 버스를 탔습니다. 자리를 찾으니, 한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옆좌석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고요. 시외버스에서 처음 만나는 옆 사람에게 말을 걸기는 쉽지 않지요. 그래서 이럴 때는 창밖 풍경만을 구경하거나 잠을 자기 일쑤입니다. 적당히 덜컹거리는 버스의 리듬은 자장가와 다름없습니다. 창밖을 구경하다가도 슬며시 눈을 감게 됩니다.

어느 순간 여자는 잠이 들었고, 슬며시 옆자리의 시인 어깨에 머리를 얹습니다. 시인도 스르륵 잠이 들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동침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어떤 인연일까요? 과거 전생 언젠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속의 붉은 이불 속에서 한 계집아이가 기어 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 나오고, 그리고 또 아이들이 기어 나옵니다. 그사이 해가 저물고, 버스는 한 마을을 지나고 또 한 마을을 지나 천불천탑의 용화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웁니다.

“종점입니다.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여자는 슬그머니 일어나 서둘러 차 문밖으로 나가더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집니다. 시인도 슬그머니 일어나 그녀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고,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커다란 와 불이 편안하게 누워 계셨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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