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문태준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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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문태준 ‘종소리’
  • 동명 스님
  • 승인 2022.04.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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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새벽, 도량석 후 새벽예불 전 해남 대흥사에서 울리는 범종
새벽, 도량석 후 새벽예불 전 해남 대흥사에서 울리는 범종

종소리

해 질 무렵이면 종소리가 옵니다 내 사는 언덕집에 밀려와 곱게 부서집니다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낮에 보았던 무덤 생각이 났습니다 산속에 혼자 사는 무덤 묏등에는 잔설이 햇살에 녹고 있었습니다 나는 묏등으로부터 흰나비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물을 한 컵 마시고 숨을 돌리고 있을 때에 종소리가 왔습니다 종소리는 내 앞에 하얀 바탕을 펼쳐 보입니다 종소리는 수산리(水山里)에서 생겨나 내 사는 장전리(長田里)로 오는 것 같으나 누가 어디에서 당목(撞木)으로 종을 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가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종소리는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깁니다 그리고 종소리는 내내 남아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갑니다

(정현종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감상]
문태준 시인이 새로 이사 간 제주도의 장전리에는 해 질 무렵이면 범종 소리가 내려오는가 봅니다. 근처 산사에서 내려오는 소리일 텐데, 그 출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답니다.

범종은 지하의 생명체들을 구제하기 위한 소리입니다. 산사의 범종각에는 보통 네 가지 악기가 있습니다.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이 그것입니다. 법고는 지상에 사는 생명체를 위한 소리이고, 범종은 지하의 생명체를 위한 소리이며, 목어는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운판은 날짐승을 교화하는 소리입니다.

산사의 네 가지 악기가 내는 소리의 느낌이 모두 다릅니다. 법고는 수평적으로 퍼지는 느낌, 한편으로 우리의 심장을 계속해서 두들겨주는 느낌입니다. 범종 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와서 한없이 밑으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며, 목어는 내장을 두들기는 느낌입니다. 운판 소리는 가볍게 통통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지요.

시인은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은둔을 꿈꾸었다는 것인지, 종소리가 자신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제멋대로 후자일 거라 짐작해봅니다. 시인이 은둔을 꿈꾼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소리를 듣고 시인은 낮에 보았던 무덤을 생각합니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산속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는 무덤 묏등에 잔설이 햇살에 녹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흰나비 떼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흰나비 떼라기보다는 햇살이 만들어주는 아지랑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물을 한 컵 마시니 종소리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종소리가 혹 무덤에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 듯합니다.

며칠 전 시인은 종소리의 근원이 궁금하여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시인은 종소리의 근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종소리가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기고 있다는 것,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간다는 것입니다.

새벽 범종 소리와 저녁 범종 소리는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새벽 범종 소리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듯한 소리라면, 저녁 범종 소리는 “이제 그만 멈추어라!”라고 조용히 타이르는 소리로 들립니다. 낮 동안 쉼 없이 작동했던 욕망과 분노의 기계를 그만 돌리고 “이제 쉬어라!”라고 충고하는 듯합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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