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정끝별 ‘동백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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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정끝별 ‘동백 깊다’
  • 동명 스님
  • 승인 2022.03.08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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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계곡에 뚝뚝 떨어진 동백
계곡에 뚝뚝 떨어진 동백

동백 깊다

동박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면
벌 나비 없는 계절을 저리 붉게 꽃피웠을 리 없다

뜨거운 꽃술 피워올리지 않았다면
겨울나무에 깃든 동박새 노래가 저리 환했을 리 없다

새의 영혼은 높고 꽃의 영혼은 낮은 것
하늘은 날고 중력은 지는 것

동박새 한 마리 날아가 버리지 않았다면
시들지 않은 한 품 겹꽃이 저리 뚝 져버렸을 리도 없다

눈에 묻혀 언 것들은 그때 그대로 선명하다
날아갔으니 진 자리부터 겨울눈이 녹을 것이다

(정끝별 시집, ‘은는이가’, 문학동네 2014)

발길 닿은 곳마다 뚝뚝 떨어진 순천 선암사 동백
발길 닿은 곳마다 뚝뚝 떨어진 순천 선암사 동백

[감상]
동백이 ‘깊다’니? 동백이 무슨 연못이나 호수인가?

시인은 동백이 꽃핀 이유를 순전히 동박새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과학적인 해석이라 하지 않고 시적인 해석이라 하지요. 동박새 한 마리가 동백을 향해 날아들지 않았다면 벌나비도 없는 계절에 동백이 붉게 꽃피웠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얼핏 어거지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주 많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동박새는 동백의 붉은색에 끌려서 동백나무에 앉고, 동백꽃의 꿀을 따먹는다고 하니까요.

동박새의 노래가 저리 맑고 환한 것은 동백나무의 뜨거운 꽃술 때문이랍니다. 그것도 억지 같지만, 동박새가 없다면 암술과 수술의 교배도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 전혀 일리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직관은 가끔 과학적인 진실에도 부합하기도 합니다.

동박새와 동백꽃의 조화! 그것을 시인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새의 영혼은 높고 꽃의 영혼은 낮은 것
하늘은 날고 중력은 지는 것”

새의 영혼은 높아서 위로 날아오르려 하고요, 꽃의 영혼은 낮아서 아래로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또한 시적인 해석이겠지요. 하늘은 새의 영혼에 해당하고, 중력은 꽃의 영혼에 해당합니다. 새는 자신의 영혼인 하늘을 향해 날아오고, 꽃은 자신의 영혼인 중력에 순응하여 땅에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중력의 작용 또한 동박새가 날아오른 덕분이라고 합니다. 동박새 한 마리 날아오르자 아직 전혀 시들지도 않은, 마치 조화처럼 제 빛깔을 전혀 잃지 않은 동백꽃 모가지가 뚝 꺾여서 꽃송이가 추락하고 맙니다.

눈에 묻힌 채로 동백꽃 빛깔은 선연합니다. 눈 위에서도 꽃은 뜨거워서, 꽃이 있는 곳부터 눈이 녹습니다.

동박새가 없으면 동백꽃도 없고, 동백꽃이 없으면 동박새도 올 리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는 날아오르고 하나는 날개도 없이 추락하여 빛깔만 선명합니다.

이뭣고?

연못도 아니고 호수도 아닌, 동백과 동박새가 던진 화두가 깊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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