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 동명 스님
  • 승인 2022.01.05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게로’, 민음사 1985)

[감상]
겨울나무가 봄나무가 되는 과정을 ‘힘차게’ 그린 시입니다. 나무가 추운 겨울로부터 서서히, 천천히, 봄의 대기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정적인 이미지의 겨울나무가 동적인 이미지로 돌변하여 꽃피는 나무가 되는 장면을 감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제목에 ‘겨울나무’나 ‘봄나무’가 아닌, ‘겨울-나무’와 ‘봄-나무’로 표기한 것은 겨울과 나무가, 봄과 나무가 분절되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하여 좀 더 역동적인 이미지가 된 나무가 앙리 베르그송의 개념 ‘생명의 비약(élan vital)’을 이룩하여 활발발한 내적 운동을 감행한 결과 나무는 마침내 꽃 피는 나무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재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나무의 속성이 외부의 조건과 결합하여 나타난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나무는 애초부터 꽃피는 나무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바, 나무와 꽃 피는 나무의 관계는 우리 중생과 부처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우리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미 부처의 바탕이 있었던바, 그것이 수행이라는 동력을 만나 그 바탕이 발현되는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2월이 되면 나무의 심장박동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무에 귀를 대고 나무의 맥박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지금은 한겨울,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겨울나무는 봄나무가 되기 위해 명상 중입니다. 그런데 겨울나무는 봄나무와 다른 나무가 아니지요.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 정진 중일 때, 중생도 이미 부처와 다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