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정일근 ‘부석사 무량수’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정일근 ‘부석사 무량수’
  • 동명 스님
  • 승인 2022.02.08 10: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無量壽)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 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정일근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와시학사 2001)

영주 부석사 선묘각 벽화
영주 부석사 선묘각 벽화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
영주 부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

[감상]
아미타부처님의 다른 이름은 무량수여래, 무량수불입니다. 무량수불은 무량한 수명의 부처님이란 뜻으로 아미타유스(Amitāyus)의 의역(意譯)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다른 이름은 무량광(無量光)이기도 한데요, 이는 아미타바(Amitabha)의 의역입니다.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일정 수명을 사셔야 한다면,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수명을 사신다는 것이지요.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목조건물로도 유명하지만,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건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건축물보다도 부석사에서 내려다보이는 첩첩산중 산하의 시원스러운 장관이 눈에 선합니다. 오늘은 그 모습을 그리면서 참선에 들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한없는 수명의 무량수전 아미타부처님 앞에서 정일근 시인은 하필 짧은 수명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바친 선묘라는 여인의 순정을 노래합니다. 아시지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선묘는 누구나 아는, 모르는 이 없는 영원한 처녀인 바로 그 여인입니다.

무슨 인연이었을까요? 의상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재가신도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그 집의 딸이 바로 선묘였습니다. 선묘는 의상 대사의 여법한 위의와 열정적인 구도행에 반하여 스님을 평생 사모하며 모시기로 합니다.

의상 대사가 당나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선묘의 집에 들렀으나, 또 무슨 인연이었는지 그때 선묘는 집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의상 대사가 다녀갔다는 얘기를 듣고 선묘는 그동안 정성을 다해 의상 대사를 위해 만들어놓았던 가지가지 선물을 들고 부리나케 항구로 갔지만, 의상 대사를 실은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 소원을 빌었습니다.

“내가 바다의 용이 되어 스님의 배가 순항할 수 있도록 지키겠다.”

그렇게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 대사가 타고 가는 배 밑바닥을 받치면서 호위했고, 그녀의 마음은 의상 대사가 기거하는 곳은 어디든 따라갔습니다. 의상 대사가 왕명으로 봉황산(지금은 소백산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봉황산이었습니다)에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500여 명의 도둑이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묘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바위가 되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면서 도둑들을 위협하여 쫓아버렸습니다. 이후 그 바위는 부석사에 영원히 머물게 되었고, 절 이름은 ‘뜬 바위’라는 뜻의 ‘부석(浮石)’이 되었습니다.

정일근 시인은 무량한 수명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무량수전에서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선묘를 생각하며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라고 노래합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원하고, 좋은 것은 영원하지 않아서 괴로워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도 영원하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봄에 일시적으로 화알짝 피어나니 우리는 봄꽃을 찬양하는 것이요, 그것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니 아쉬웠다가 이듬해에 다시 피어나니 또 반가운 법이지요. 사람도 그렇답니다. 사라지니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사라지는 것들을 아쉬워한다기보다는 사라지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