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이호준 ‘산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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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이호준 ‘산사의 아침’
  • 동명 스님
  • 승인 2022.07.26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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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지리산 금선대 새벽 하늘
지리산 금선대 새벽 하늘

산사의 아침
_이호준

일찌감치 독경 마친 산새들
줄지어 탁발 나서는 아침
담장 뒤에 몸 숨긴 보리수나무
발끝으로 제 그림자 비빈다
바람도 없는데 저 홀로 법당 문 열고
백팔 배 올리는 풍경(風磬)
안개 돌아가자
밤새 하늘 어귀 정박해 있던 앞산
삐걱삐걱 노 저어 와
공양간 앞을 기웃거린다

(이호준 시집, ‘티그리스 강에는 샤가 산다’, 천년의시작 2018)

해남 대흥사의 새벽 도량석
해남 대흥사의 새벽 도량석
도량석 후 새벽 예불 중인 해남 대흥사
도량석 후 새벽 예불 중인 해남 대흥사

[감상]
제 방 옆에서는 아침마다 산새들이 노래합니다.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깨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인은 산사에서 사는 새들의 노래가 독경(讀經)이라고 말합니다. 그럴듯합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열심히 독경하더니, 먹이를 구하러 줄지어 자리를 옮깁니다. 아, 그것은 탁발하는 모습이군요. 남방 스님들이 줄지어서 탁발을 나서는 장면과 한가지입니다. 스님들의 생계가 탁발에 있듯이 새들의 생계도 탁발에 달려 있습니다.

담장 뒤에 몸을 숨긴 보리수나무가 햇살을 받아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릴 때, 풍경이 햇살에 제 그림자를 법당으로 밀어 넣더니 까딱까딱 백팔배를 올립니다.

안개에 아랫부분이 가려 있어서 마치 바다에 정박한 배처럼 보였던 앞산이 안개가 걷히면서 사찰 쪽으로 다가옵니다. 무얼 하려고 사찰로 왔을까요? 배가 고픈가 봅니다. 앞산 그림자가 공양간 창문을 슬며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산사의 아침은 밝아옵니다. 비나 눈이 오지 않으면 이러한 풍경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스님들이 매일 예불과 기도를 올리고, 비슷한 시간에 참선하듯이, 새들도 보리수나무고 풍경도 앞산도 똑같은 행위를 반복합니다. 수행이란 곧 반복하는 것입니다. 반복하다 보면 해야 할 일이 그야말로 자연스러워집니다. 해야 할 일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곧 수행이고 도통이고 견성입니다.

이런 산사의 풍경을 구경해보셨는지요? 아직 구경하지 못하셨다면 템플스테이 신청해서 산사에서 하룻밤 묵어보시지요. 산사의 묘미는 새벽 풍경에 있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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