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나희덕 ‘방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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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나희덕 ‘방을 얻다’
  • 동명 스님
  • 승인 2022.09.20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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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유명한 안동 봉정사 영산암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유명한 안동 봉정사 영산암

방을 얻다
_나희덕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희덕 시집 <사라진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감상]
나희덕 시인이 광주에 살 때 담양이나 화순쯤에 방을 하나 얻어서 작업실로 쓸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한옥으로 분위기 좋은 집을 상상했었지요. 마침 딱 맞는 집을 찾았습니다.

집이 두 채인데, 딱 봐도 두 식구밖에 보이지 않아서 안성맞춤이다 싶었습니다.

"저어, 방을 한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대답했습니다.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마음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다는 말이 시인에게 꽂혔습니다. 시인은 그냥 발길을 돌렸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그 방을 쓰고 있답니다. 그만큼 그 방이 시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지요.

방을 얻지 않고도 시인은 방을 얻었습니다.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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