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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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 동명 스님
  • 승인 2021.12.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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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두물머리에서.
두물머리에서.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어차피 나는
더 나은 일을 알지 못하므로
강물이 내게 어떤 일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물이 내게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한번도 서러워하지 않은 채
강물이 하는 일을 지켜본다

나는 오직 강물에만 집중하고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저 천년의 행진이 서럽지 않은 건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를 지나온 강물에게
내력을 묻지 않는다
모두 이미 섞인 것들이고
강변에선 묻지 않는 것만이 미덕이니까

강물 앞에서 나는 기억일 뿐이다
부정확한 시게공이 가끔 있었고
뜻하지 않은 재회가 있기도 하지만
강물의 행진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계속된다

강물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한다는 것
한번도 서럽지 않다는 것
내가 기억이 된다는 것

(허연 시선집, ‘천국은 있다’, 아침달 2021; 허연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 2020)

남양주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
남양주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
겨울의 두물머리.
겨울의 두물머리.

[감상]
허연 시선집은 시인 본인이 엮은 것이 아니라 후배 시인 오은, 유재영, 유희경, 송승언 등과 문학평론가 오연경이 엮은 것입니다. 허연 시인에게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인정하는 후배 시인들이 선배 시인에게 헌정한 시선집이라 하겠습니다. 희유하고 아름다운 일이지요. 허연은 요즘 시인들 중에서 독자층을 튼실하게 확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명입니다.

강을 소재로 한 시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중 허연의 시는 꽤 독특합니다. 이 시가 상징하는 바가 강을 소재로 한 다른 시인들의 시와 다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 강은 주로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 굽이치는 삶,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허연의 시에서도 강은 역사와 삶이라 할 수 있음에는 분명한데, 왜 다르게 느껴질까요?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제목부터가 ‘수상’합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강물이 내게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이놈의 강물이 뭐란 말인가? 이 뭐꼬? “이 뭐꼬”라는 화두처럼 저에게 쓰임이 많은 것도 없습니다. “이 뭐꼬?”

“나는 오직 강물에만 집중하고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이 뭐꼬? 강물을 강물 아닌 다른 것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강물은 그냥 강물입니다. 20대 초반에 라즈니쉬의 책 중에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이 제목이 확실치는 않습니다)를 읽었던 것 같아서 네이버 책에서 찾아보려니 100권이 넘게 검색되는 통에 포기합니다. 그 책의 주된 메시지는 “우리는 어떤 사물을 상징적인 의미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허연의 강물도 그냥 강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저 천년의 행진이 서럽지 않은 건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그렇습니다. 강물은 천년 이상 행진해왔고, 하류에 당도한 강물이 한번도 거슬러서 상류로 간 적은 없습니다. 아울러 도시를 지나온 강물에게 내력을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모두 이미 섞인 것들이고
이미 지나쳐버린 것들이고
강변에선
묻지 않는 것이 미덕이니까”

이 대목에선 바로 우리 출가자들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 출가자들도 지나온 내력을 묻지 않습니다. ‘강변’은 ‘승가’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출가 전의 일이 저절로 알려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부러 물어서 들추지 않는 것이 우리 승가의 미덕입니다. 세속의 삶에서도 그럴 수 있겠습니다.

“강물의 행진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계속된다”

강물의 행진은 ‘업(業, karma)의 흐름’에 다름 아닙니다. 업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흘러가고,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업의 결과인지, 우연인지, 100% 업의 결과인지, 단지 몇 퍼센트만이 업의 결과인지 확실히 알려주지 않은 채 흘러갑니다. 강물처럼 흘러만 갑니다. 업의 흐름이 서럽다고 느낄 수 없는 것은 업의 흐름도 한 번도 거슬러 되돌아간 적은 없기 때문일까요?

시인은 강물, 곧 업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미치더라도 서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단지 자신이 기억이 될 뿐이라고 합니다. 기억은 곧 식(識)입니다. 업과 식이 만나면 업식(業識)이 됩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버리는 것 같지만, 그 물은 결국 증발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다시 돌아온 강물이 옛 강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강물의 행진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계속됩니다.

‘강물’을 다루는 허연의 특이성은 ‘화두’를 단아한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휘저어버리는 데 있는 듯합니다.

“부정확한 시계공이 가끔 있었고
뜻하지 않은 재회가 있기도 하지만”

오늘은 흐르는 강물 앞에 서보렵니다.

“강물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한다는 것
한번도 서럽지 않다는 것
내가 기억이 된다는 것”

이 뭐꼬?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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