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한강 ‘조용한 날들’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한강 ‘조용한 날들’
  • 동명
  • 승인 2021.12.28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감상]
2018년 1월 인도 콜카타의 한 서점에서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제법 눈에 띄는 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2016년 맨부커상을 받으면서 한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학인으로서 한강의 출발은 시였습니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한강현’이란 이름으로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그리고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2013년도에 발간합니다.

‘조용한 날들’은 시인이 좀 아팠을 때 쓴 시입니다. 아프다 보니 밖에 덜 나가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아서 조용한 날들이었을 겁니다.

“아프다가”라는 첫 연이 탁 걸렸습니다. ‘아프다’라는 형용사에 동사에 붙는 어미 ‘-다가’가 붙은 것이 좀 어색했던 것입니다. ‘-다가’의 사전적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미] 어떤 동작이나 상태 따위가 중단되고 다른 동작이나 상태로 바뀜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어미] 어떤 동작이 진행되는 중에 다른 동작이 나타남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어미] 어떤 일을 하는 과정이 다른 일이 이루어지는 원인이나 근거 따위가 됨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표준국어대사전)

“아프다가”의 ‘-다가’는 1번이나 2번에 해당하는데, 모두 동사에 붙은 어미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아프다’를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보지 않고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로 본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병을]앓다가”가 되겠습니다. 한 며칠 앓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습니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세월의 힘으로 점점 둥글어지고 있는 돌이었습니다. 그때 시인의 한마디가 재밌습니다.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그렇지요. 아픔은 생명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지요. 생명이 있다 보니,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는 것이지요. 생명이 있어서 아픔도 있는 것, 한창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무생물이 부러울 수도 있습니다.

저도 가끔은 무생물로 태어날 수 없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무생물로 태어난다’는 말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이지요.

시인은 돌멩이를 오래 들여다보았나 봅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돌멩이는 마주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그때 석양의 햇살이 돌멩이의 네 언저리를 에워싸고 아름다운 조명을 비추어주었습니다.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손을 뻗지 않았다는 말을 부러 하는 것은 손을 뻗어 돌멩이를 줍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왜 욕심이 생겼을까요? 아프지 않은 돌멩이가 부러워서, 또는 햇살이 비치는 순간 너무도 아름다워서였을까요?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 판단은 독자가 자유롭게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엇에게도’가 붙은 것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비단 이 돌멩이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에게도 손을 뻗지 않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니까요.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일어난 ‘아주 작은’ 일에서 시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일으켰다거나 뭔가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돌멩이 하나를 발견하고 마음이 가기도 했으나 이내 마음을 내려놓고 “손을 뻗지 않았다”고 말할 뿐입니다. 덧붙여서 돌멩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강 시인은 마음이 가는 사물에 오히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확산시킵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사물의 의미는 오히려 무한대가 됩니다.

대단한 병을 앓은 것 같진 않고요. 감기몸살 정도의 미질을 앓던 시인이 산책하는 길에 돌멩이 하나를 보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으나 손을 뻗어 만져보지는 않았다는, 그 상황을 우리도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