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윤외숙 ‘아침이 오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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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윤외숙 ‘아침이 오는 순서’
  • 동명 스님
  • 승인 2021.11.0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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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문경 김용사 금선대 목어에 걸린 해.
문경 김용사 금선대 목어에 걸린 해.

아침이 오는 순서

새가
새벽의 한 귀퉁이를 찢자
아침이 왔다

창을 뚫고
군자란 붉은 꽃숭어리를 지나
아마릴리스 수국 공작선인장 정수리를
차례로 물들이는 미다스 손
눈이 멀 듯 한데

달과 해를 바꿔 단 너로 인해
우리의 아침은 오늘도 미완성

제아무리 뜻있는 새가
새벽의 한 귀퉁이를 찢어낸들 무엇 하나
네가 눈뜨고 일어서
두꺼운 커튼을 열어재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을

(시락 제3 동인지 ‘조금 더 사소해지는 사이’, 담장너머 2018, 69쪽)

해남 대흥사 새벽, 만물을 깨우는 법고를 치는 스님.
해남 대흥사 새벽, 만물을 깨우는 법고를 치는 스님.
김제 금산사 방등계단과 미륵전에 햇빛이 든다.
김제 금산사 방등계단과 미륵전에 햇빛이 든다.

[감상]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아버지 실레노스를 극진히 대접한 대가로 디오니소스에게 소원 한 가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욕심 많은 미다스 왕은 “내 손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건 황금으로 변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소원은 물론 이루어졌고요. 미다스 왕의 손이 닿는 것이면, 그 어떤 것이건 황금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윤외숙 시인은 새벽 햇빛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비춰주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햇빛이 창을 뚫고 들어와 군자란 붉은 꽃숭어리를 비추어주더니 아마릴리스, 수국, 공작선인장을 차례로 황금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너무도 황홀하여 넋을 잃을 지경이언만, 밤과 낮을 거꾸로 사는 ‘너’(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으니 그 환희로운 장면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어서, 혼자 보기 아까운 ‘나’는 심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렇지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설법하고 있습니다. “새벽의 한 귀퉁이를 찢으면서 아침이 왔다. 태양이 왕림했다. 세상이 밝았다. 광명이 찾아왔다!”라며 새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 범종 소리, 법고 소리, 목탁 소리, 기적 소리, 개구리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더하여 외쳐대건만, 캄캄한 한밤중인 사람이 많지요.

맞습니다! 눈뜨고 일어서서 두꺼운 커튼을 열어 재껴야 찬란한 태양이 내 방의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어주지요.

새가 노래하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과 같은 것이요, 눈을 뜨는 것은 스스로 불성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며,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지혜의 눈, 광명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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