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박준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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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박준 ‘낮과 밤’
  • 동명 스님
  • 승인 2021.11.30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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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간월암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
간월암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

낮과 밤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2018)

노을로 물든 간월암 밤의 길목.
간월암 밤의 길목, 낙조.

[감상]
안면도에 가신 적이 있으신가요?
간월암에 가신 적이 있으신지요?
간월암 앞바다에 엄청나게 많은 철새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낮에도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철새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한낮에 새들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낮에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한낮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떼들의 모습은 보기 힘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싶거든 안면도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바닷가로 나가셔야 합니다. 아침이면 수많은 새떼가 군무를 춥니다. 군무를 춘다기보다는 아침이 되면 먹을 것을 구하러 길을 떠나는 겁니다.

박준 시인이 관찰한 새들은 강변의 새들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이면 우우우 날아올라 길을 떠납니다. 어디로 갈까요?

사람들이 꼭 그렇습니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모두 어디론가 떠나갑니다. 아침 지하철에는 새떼들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거나 빽빽하게 모여 있습니다. 열차 문이 열리면 열차 속으로 사람들이 쏙 빨려들었다가 다시 문이 열리면 새떼들처럼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나옵니다. 열차를 나선 사람들은 뛰다시피 걸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에 올라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집니다. 어디로 갈까요? 어디 가서 무얼 하는 것일까요?

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수많은 새떼가 바닷가로 철수하는 군무를 춥니다. 사람들은 다시 지하철에 집결했다가 애초에 갔던 곳으로 다시 옵니다. 우리도 새떼들처럼 꼭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들은 언제 떠난 것일까요? 눈들이 밤이 되자 동네 공터에 새처럼 가볍게 착륙하기 시작합니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는 마을에 새들도 모두 잠들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새처럼 살고 있는데, 우리는 왜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오히려 더 무겁고 큰 집을 원하는 것일까요? 새처럼 가볍게 집 짓고 ‘훌쩍’ 사는 것의 행복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 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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