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기] 편견은 양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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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편견은 양파처럼
  • 이기선
  • 승인 2021.01.18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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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송은이, 김숙, 유세윤, 김중혁이 출연하는 <북유럽>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봤어요. 배우 정소민 씨가 초대손님으로 나와서 자기 인생 책으로 《어린 왕자》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라 끝까지 못 봤는데 몇 살 더 먹어서는 감동하면서 읽었고, 자라면서 다시 볼 때마다 와닿는 게 다르더라고.

KBS 2TV <비움과 채움 북유럽> 방송화면 캡처.

비슷한 경험을 다들 해 보셨을 거예요. 책이든 영화든 TV 드라마든, 처음 볼 때랑 다시 볼 때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부분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걸.

​편집자도 책을 만들어 가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읽을 때마다 책이 달리 보이는 거죠. 거듭 읽을 때마다 느낌이 별로인 쪽으로 짙어지는 책을 편집할 때는 기운이 점점 빠지기도 해요. 이와 달리 읽을 때마다 좋은 쪽으로 새로워지는 책을 만나면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신이 나죠. 가끔은 운 좋게 얻어걸렸는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을 때도 있고요. 이번에 편집한 《누가 진짜 엄마야?》가 바로 그런 경우였어요.

​처음에 에이전시에서 보내온 자료를 보았을 땐 이런 생각이 들었죠. '요새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깨져 나가는 흐름인데 그에 딱 어울리는 좋은 그림책인데. 레즈비언 커플 가족 이야기가 이렇게 산뜻하게 표현되다니! 독자들이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도움이 되겠어.' 책이 안 팔릴 수 있다는 걱정도 들었지만 누군가는 이런 책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력히 밀어붙였죠.

​그렇게 한국어판 계약을 하고, 노지양 번역가께 번역을 부탁드리고, 번역 원고를 받고 편집에 들어가 마감을 할 때까지만 해도 책을 바라보는 제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요. 물론 보면 볼수록 좋은 책이라는 믿음은 강해졌죠. 좋은 면들을 하나둘씩 더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사건은 책 소개 글(이른바 보도자료)을 쓸 때 일어났어요. 책을 신나게 만들기는 했는데 소개 글을 쓰려니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레즈비언 커플 가족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자니 독자를 설득할 자신이 없고,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고만 쓰자니 너무 평범해지고... 며칠을 낑낑거리며 궁리하다 보니 문득 엘비와 니콜라스가 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나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떠올린 것이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이었어요. 어쩌면 누가 진짜 엄마냐고 묻는 니콜라스의 첫 질문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달까. 어쩌면 엘비가 그 질문을 부담스러워했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거죠.

​그다음엔 엘비가 "두 분 다."라고 처음으로 답했을 때 니콜라스가 왜 알아듣지 못하고 거듭 누가 진짜 엄마냐고 되묻게 되었는지가 또 궁금해지더라고요. 그 답은 금방 나왔어요. 니콜라스는 배 속에 아이를 담고 있던 여성만이 엄마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엄마가 둘이라는 엘비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자기가 기대하는 답(둘 중 한 명만 진짜 엄마)을 얻기 위해 엘비에게 계속 물었던 거예요.

​이 두 가지 주제를 잡고 나니 책 소개 글이 술술~ 물론 고개를 몇 개 더 넘긴 해야 했지만 아무튼 술술 써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책이 또 달리 보이는 순간이 왔어요. '그런데 이 그림책을 레즈비언 커플 가족 이야기로만 한정할 수 있는 건가?'

​물론 그렇게 봐도 자연스러운 책인 건 맞아요. 하지만 정말 그렇기만 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더라고요. 엘비의 두 엄마가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책에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거든요. 둘 사이가 친한 건 분명해요. 함께 찍은 사진도 그렇고, 서로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는 장면도 그렇고. 그렇지만 친한 사이가 곧 연인은 아니잖아요. 친한 사이가 되는 방법은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많잖아요.

《누가 진짜 엄마야?》

사실이 그러한데 첫눈에 레즈비언 커플 가족 이야기로 단정해 버리다니... 남의 고정관념 깨고 싶다고 오만하게 굴다가 제 고정관념과 마주치니 얼마나 부끄럽던지... 하지만 제 안의 편견을 양파 까듯 한 겹 벗겨 냈다는 기쁨은 부끄러움을 덮고도 남았어요. 이런 맛에 책 읽고 책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직업 잘 선택한 거죠.

​이제 저는 《누가 진짜 엄마야?》가 어떻게 읽힐까, 독자분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을 만날까가 정말정말 궁금합니다. 그러니 책을 보고 의견을 전해 주세요. 많이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TMI: 책에는 노랑이 많이 쓰였는데요, 노랑은 성중립(젠더뉴트럴) 색깔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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