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해남 윤씨 고택 ‘녹우당’
상태바
[지안의 문화이야기] 해남 윤씨 고택 ‘녹우당’
  • 노승대
  • 승인 2022.04.07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남, 강진으로 다시 내려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녹우당, 대흥사를 들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답사길에서는 두 곳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녹우당은 연동 해남 윤씨 종갓집 사랑채의 당호이지만 워낙 유명한 건물이라 종갓집을 부르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곧 ‘녹우당’이라 하면 해남 윤씨 종갓집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 해남에 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선비는 금남 최부(1454~1504)였다. 나주 출신인 최부는 김굉필, 정여청, 김일손 등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해남 정씨의 외동딸과 결혼해 해남의 해리에 관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해 벼슬하던 최부는 뛰어난 제자들을 두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연동 해남 윤씨 종가를 일으킨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이다.

강진 출생인 윤효정은 최부에게 배우기 위해 강진 해남을 오가다가 해남 정씨 문중의 대부호인 정귀영의 마음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에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1504년 스승 최부가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참형을 받고 죽자 벼슬길을 단념했다. 고기 잡고 나무하며 조용히 은거하자는 뜻은 그의 호인 어초은(漁樵隱)에 다 나타나 있다.

그때 풍습대로 처가살이하던 윤효정은 많은 재산도 처가에서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전에는 남녀 자손들에게 차별 없이 재산을 분배하는 남녀 균분제가 사회의 통념이었다. 윤효정은 명당을 찾으러 나섰고 백련동(지금의 연동마을)에서 길지를 얻어 500년 명문가의 터전을 닦았다. 아직도 세심한 손길로 종가를 보살피는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가문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우리 전통문화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해남에 녹우당이 있음은 해남의 보물이자 국가의 자산이다.

1998년 2월 처음으로 공동답사 갔을 때는 해남 윤씨 어초은파(연동파) 14대 종손인 윤형식 선생이 몸소 나와 맞아주시고 집안과 유물을 다 설명해 주셨는데 이제 연로하셔서 서울로 치료차 올라가셨다 한다. 그렇게 또 한 세대가 흘러가고 다음 세대가 오게 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회복되시기를 바란다.

 

마을 어귀 작은 둔덕에는 묵은 해송이 늘어섰고 안쪽으로 네모난 연못과 정자가 있는 작은 섬이 있다. 녹우당의 바깥 정원인 셈이다. 멀리 본채가 보인다.

 

사랑채 입구의 은행나무는 윤효정이 집을 지으며 심었다고 한다. 자연히 수령 500년이 넘었다. 은행나무 왼쪽으로 높이 솟은 사랑채 소슬대문이 보인다.

 

사랑채는 특이한 ‘ㅁ’자 구조다. 사랑채의 본채 앞에 눈썹지붕처럼 비나 햇빛을 가리는 차양막이 설치돼 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을 감안한 장치다.

 

윤효정의 4대손인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효종의 스승이었는데 효종에게 수원집을 하사받았고 효종이 죽자 뜯어 옮긴 집이 바로 사랑채다.

 

녹우당(綠雨堂) 현판은 윤선도의 벗 옥동 이서의 글씨다. 집 뒤 산자락 비자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푸른 비가 내린다고 하여 녹우당이라 지었다.

 

운업(芸業)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모르는데 ‘꽃이 성하도록 힘쓴다’는 의미로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사랑채 남쪽의 250년 묵은 회화나무.

 

녹우당은 지금도 자손들이 살고 있어 안채는 잘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우연히 종손 아드님의 호의로 들어가 살펴보았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ㅁ자 구조다.

 

안채 부엌 지붕 위에는 특이한 시설이 있다. 연기가 지붕 위로 바로 빠져나가는 환기시설이다. 송광사 건물 지붕 위에도 있는데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다.

 

안채 뒤쪽의 후원. 조선시대 양반가의 여자들은 나들이가 쉽지 않아 안채 뒤쪽으로 후원을 두는 경우가 많다. 꽃도 가꾸고 산책도 하며 쉬는 공간이다.

 

후원 한쪽에는 사당으로 쓰던 건물이 있다. 보통 종가 오른쪽 뒤에 사당을 둔다는 원칙을 따랐다. 추원당(사당)을 밖에 새로 지은 후 쓰지 않는 듯하다.

 

종가 앞쪽 길을 따라 왼쪽 숲으로 들어가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추원당이 있다. 쭉쭉 뻗은 낙락장송이 걷는 이의 발길과 숨길을 시원스레 터놓는다.

 

추원당은 제사 영역이라 닫아놓았다. 건물 앞과 옆에 맞배지붕형 차양시설이 있다. 어초은 윤효정의 제사를 모신 후 문중회의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비자나무숲으로 가는 길의 입구다. 덕음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안 된다는 윤효정의 유훈을 따라 후손들이 숲을 잘 가꾸며 지켜왔다. 지금은 지정 보호림이다.

 

숲길 안쪽 해남 윤씨문중을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윤효정의 부부묘다. 그는 세 아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출사하게 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윤효정의 불천위 사당. 가뭄과 홍수로 세금을 못 낸 농민들이 옥에 갇혔을 때 세 번이나 곡식을 대납해 방면시켰다. 적선지가로서의 명망도 함께 쌓은 것이다.

 

윤선도의 불천위(不薦位) 사당. 불천위는 4대가 지나가도 계속 제사를 모시는 분이다. 국가나 유림에서 지정하므로 가문의 영광이다. 보통 4대가 지나가면 그 위패를 당사자의 묘에 묻는다. 곧 사당에는 항상 4대 조상의 위패만 있게 되는 것이다.

 

윤효정 묘소, 사당으로 가는 길의 소나무도 지정 보호수다.

 

종가 뒷담길의 운치와 풍광도 빼놓을 수 없다. 추원당에서 뒷담을 낀 상수리나무 오솔길과 대숲, 비자나무 숲길에서 이 명문 가문의 내력을 다시 되새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1668~1715)는 그림도 잘 그렸다. 자화상에서는 자신의 포부를 펴지 못한 선비의 고뇌와 쓸쓸함이 그대로 읽힌다.

 

윤선도가 <어부사시사>에서 어부의 삶을 노래했듯 윤두서도 일반 백성의 삶을 따뜻이 바라보았다. 풍속화의 효시가 되어 김홍도, 신윤복으로 이어진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