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청송 송소고택·주왕산 대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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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청송 송소고택·주왕산 대전사
  • 노승대
  • 승인 2022.05.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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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봄이 달아나고 있다. 서울 시내는 이미 녹음의 계절이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아니 이 봄을 그냥 보내기 싫어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우리의 청춘(?)도 이제 고갯마루에 거의 올라왔지 않은가. 꽃피는 봄날의 마지막을 뒤쫓아 푸른 솔의 고장으로 무조건 직진, 청송(靑松)을 다녀왔다.

사통팔달로 뚫린 고속도로 때문에 청송도 그리 먼 길이 아니다. 예전에는 안동을 지나 굽이굽이 국도를 지나가야 했지만 상주-영덕 간 고속도로를 타면 이제는 아예 안동을 보지도 못한 채 청송IC로 나갈 수 있다. 하루에 다녀오기 벅찼던 길을 이제 다른 곳을 들러서 주왕산을 갔다 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청송은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특수한 지형이 많아 국가 지정 지질공원이 많다. 신성계곡은 1억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암층이 오랜 세월 흐르는 물이 깎아내려 곳곳에 층암절벽과 깊은 소, 기묘한 여울을 만들었다. 백석탄과 방호정 풍광이 대표적이다. 주왕산도 또한 지질공원이다. 또 청송이니만큼 청송 심씨의 본향인지라 99칸 심부자집으로 알려진 송소고택도 있다.

 

신성계곡은 15km 정도의 구간으로 곳곳에 바위 절경을 빚어 놓았다. 이제야 한창 흐드러진 겹벚꽃의 자태가 황홀하다. 계곡 건너로 유채밭이 보인다.

 

신성계곡의 백미 백석탄(白石灘). 하얀 돌이 빛나는 여울이니 비가 크게 한번 오면 정말 장관이겠다. 백석탄 포트홀이라 부르는데 돌개구멍이란 소리다.

 

지각변동으로 기울어진 퇴적암 바위절벽 위에 서 있는 방호정. 조준도(1576~1665)가 1619년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처음 지었다.

 

신성계곡에 있는 수직단애 암벽이다. 앞쪽으로는 방호정 쪽에서 흘러온 물이 흘러간다. 워낙 청정지역이라 다슬기(골부리)도 많았지만 이제 채취금지다.

 

안동 길안면과 청송은 사과로 유명하다. 일교차가 커 당도가 높고 단단하다. 어디를 가나 사과꽃이 만발했고 내가 질세라 민들레꽃이 대지를 수놓았다.

 

주왕산 초입의 단골식당은 항상 기대된다. 코로나가 유행인지 아닌지 이 집에서는 도대체 모르겠다. 어디나 음식값이 올랐지만 그래도 가성비가 좋다.

 

고찰 대전사 마당에서 바라본 기암. 당나라와 대적하다 주왕산으로 피신한 주왕을 찾아낸 마일성 장군 형제들이 깃발을 꽂았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생겼다.

 

대전사 명부전 시왕들은 전부 아주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화려한 채색도 없다.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진흙으로 형상을 만든 소조상이다.

 

주왕산협곡의 급수대는 주왕이 바위 위쪽에서 계곡의 물을 길어 올렸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이 생겼다. 화산재가 식으며 생긴 응회암으로 주상절리가 보인다.

 

주왕산 협곡을 뚫고 지나가는 주방천은 계곡미가 뛰어나다. 가을 단풍이 유명하지만 봄풍경도 볼만하다. 덩치 큰 돌들이 자연스럽게 놓여 깊고 그윽하다.

 

서로 닿을 듯이 붙어있는 바위협곡 사이를 뚫고 가면 용추폭포를 만난다. 억겁의 세월을 흐르는 물이 이런 풍경을 만들었다. 무엇이든 다 공력이 필요하다.

 

주왕암 입구의 벚꽃도 이제 한창이다. 좁은 협곡, 볕이 들지 않으니 봄도 훨씬 늦었다. 중층누각 형태의 가학루가 주왕암의 대문이다. 현판 글씨가 좋다.

 

주왕이 숨어있었다는 주왕굴. 굴 옆으로 위쪽 절벽에서 맑은 물이 떨어진다. 주왕이 세수하러 나왔다가 마일성 장군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주왕산계곡에는 진달래보다 늦게 피는 수달래가 많이 핀다. 색이 진하고 검은 반점이 있다. 주왕의 피가 계곡을 따라 흐르며 수달래로 피어났다고 한다.

 

송소고택의 소슬대문. 청송 심씨의 시조 심홍부의 묘도 청송에 있다. 청송의 심씨 동족마을은 이성계에 반대해 두문동에 들어간 심원부의 후손들이라 한다.

 

송소고택 현판은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이며 전서에 능했던 위창 오세창의 유묵이다. 조선시대에 청송 심씨는 정승 13명, 왕비 3명을 배출했다.

 

소슬대문에서 안쪽으로 바라본 풍경. 정면에 헛담을 두어 안채 내부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배려했다. 사랑채와 안채로 가는 손님의 행로도 달라졌다.

 

안채 풍경. 이 집은 영조 때 만석꾼으로 불린 심처사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무렵에 지었다. 담으로 둘러친 대지만 7,603㎡(2,300여 평)에 이른다.

 

안채 문간채의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이글거린다. 왼쪽 위에 소죽을 쑤었던 소죽가마가 보이고 장작더미도 보인다. 별안간 따뜻한 장판방에서 한잠 자고 싶다.

 

송소고택 내의 별채. 귀한 손님이 오면 묵어가던 곳이다. 한가할 때 하룻밤 와서 쉬고 싶을 정도로 정갈하고 운치가 있다. 실제로 고택숙박을 할 수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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