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보배의 섬 진도와 해남 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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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보배의 섬 진도와 해남 달마산
  • 송희원
  • 승인 2022.03.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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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수군은 왜 서해안으로 진출하려고 애썼을까? 가장 큰 목표는 군수물자의 보급이었다. 서해안을 따라 오르며 영산강, 금강, 한강을 통해 육지에서 활약하는 육군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실제로 개전 초기에는 낙동강을 이용해 보급물자를 성주에 쌓아놓기도 했으나 홍의장군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의 수로를 장악했고 남해 바닷길은 이순신에게 막혀 서해로 진출할 수 없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는 1,000리 길, 육로로 우마차를 이용해 물자를 나르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곳곳에서 의병과 승병이 게릴라전을 펼치니 왜군도 보급선을 지키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또한 선조가 북행길에 오르자 일본군은 평양까지 쫓아갔고 보급선은 더 길어지기도 했다.

일본수군은 어떻게든 진도 울돌목에서 이순신을 넘어서야 했으나 일격에 무너져 서해 바닷길은 엄두도 못 냈다. 이미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왜군은 9월 7일 직산(현 천안지역) 전투에서 패한 후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명량해전의 패배로 후방의 지원이 끊어졌고 결국 남쪽으로 후퇴해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주둔하게 된다. 이처럼 명량대첩은 기적적인 승전이기도 했지만 전쟁의 판도를 바꾼 위대한 승리였다.

 

진도(珍島)는 글자 그대로 보배섬이다. 진돗개가 있고 진도 씻김굿이 있고 진도 홍주가 있다. 진도아리랑,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 북놀이도 있어 노래하며 놀기 좋아하는 진도사람들의 성정을 알만하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진도의 딸 아닌가.

 

제주도에서 건너온 꽃소식에 가는 곳마다 백매도 피고 홍매도 피었다.

 

남도진성은 남도석성이라 불렀었다. 고려말 왜구들의 노략질로 백성들은 모두 섬을 비우고 육지로 들어갔다가 조선 초 대마도를 정벌한 후 다시 돌아왔다.

 

진도 사람들도 세종 18년(1437)에야 다시 돌아왔다. 진도진성은 예전의 석성을 이 무렵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 쌍운교는 해방직 후 놓았다.

 

고산 윤선도는 1650년 굴포리에 방조제를 쌓아 만든 농지 100㏊를 기근에 시달리는 진도 백성에게 나눠 줬다. 윤선도를 모시는 굴포리 사당.

 

진도와 해남의 배추밭, 대파밭은 그대로 월동시킨 후 2~3월에 수확해 도시로 보낸다. 겨울에도 온화한 날씨 덕분이다. 눈이 내리면 그 풍광이 볼만하다.

 

진도 상만리 비자나무. 둘레 6.35m에 달하는 거목이다. 나이는 600년 정도라 하는데 제주도 비자림의 새 천년 비자나무보다 더 고풍스러운 풍모다.

 

진도의 쌍계사는 인조 26년(1648)에 중건됐다. 절 뒤로는 키 큰 동백나무가 울창하고 남쪽 경계는 운림산방이다. 옆 계곡 상록수림도 천연기념물이다.

 

대웅전 정면 모퉁이 기둥에 설치한 청룡, 황룡은 얼굴과 함께 몸체도 표현한 모습이다. 무서운 이빨도 없다. 사납기는커녕 깔깔거리며 한바탕 웃는다.

 

진도의 운림산방은 필수코스다. 초의 스님의 소개로 추사의 제자가 된 소치 허련은 추사유배 후에도 세 번씩 제주도로 건너갔고 추사 사후 이곳에 은거했다.

 

1956년에 세운 벽파진 전첩비. 이순신은 이곳에서 16일 동안 머물다 9월 15일 우수영으로 옮겼다. 제자리 돌을 깎아 귀부를 만들고 비를 세웠다.

 

해남의 해창주조장은 1927년 일본인 시바다 히코헤이가 설립했다. 일본식 건물과 창고가 그대로 있다. 지금은 6°, 9°, 12° 등의 생막걸리를 만든다.

 

700년 된 배롱나무를 필두로 40여 종의 수목과 수석, 연못이 어우러진 일본식 정원. 네 번 주인이 갈렸지만 그대로 유지된 것만 해도 대단하다.

 

달마산 끝자락, 도솔봉 송신탑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 도솔암으로 간다. 능선길로 700m 거리다. 좌우로 온 산하가 내려다보이니 어느 쪽이나 절경이다.

 

달마산은 남북으로 누워있고 그 남쪽 끝이 바로 해남 땅끝마을이다.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완도가 보인다. 서쪽으로는 물론 벽파진해협을 건너 진도 땅이다.

 

달마산은 악산이다. 산세는 매우 거칠고 날카롭다. 화강암이 아니고 흰빛이 도는 규암이다. 곳곳에서 바위가 솟아올랐고 햇빛을 받으니 더욱 빛난다.

 

도솔암은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파괴된 후 오랫동안 만신들의 기도처가 됐었다. 월정사의 법조 스님이 2003년 현몽을 받고 찾아와 복원했다.

 

법당 50m 아래에는 용샘이 있다. 물이 없으면 기도처가 될 수 없다. 전에는 이 용샘의 물로 생활했는데 오랜 겨울 가뭄에 용샘도 말랐다. 안타깝다.

 

달마산 미황사에 새로 사천왕문이 들어섰다. 악귀를 딛고 서 있는 부드러운 사천왕이다. 옛 백제지역이라 백제 양식인 일본 호류지 사천왕을 모델로 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을 때 바라보는 미황사 대웅전은 달마산의 흰빛 칼날능선과 어울려 탄성을 자아낸다. 또한 도솔암과 함께 저녁놀을 바라보는 명소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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