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경주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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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경주 남산
  • 노승대
  • 승인 2022.04.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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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서울 서라벌은 전성기 때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됐을 정도로 발전했다. 서라벌에서 국제무역항 울산까지는 집과 담이 연이어 붙어 있었다고도 했다. 이렇게 인구가 집중된 도시에서 산세 좋은 남산은 자연스럽게 불교의 사찰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경주 남산은 일찍이 노천박물관으로 주목받았고 남산 전체가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 118구의 불상, 96기의 석탑, 147개소의 절터가 길이 8km, 폭 4km 남산의 골짜기와 능선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진정 우리 민족 불교문화의 보고다.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탄생지인 나정이 남산 기슭에 있고 그의 궁궐터도 이곳에 있으며 신라 말기 견훤에게 잡혀 죽은 경애왕이 놀던 포석정도 바로 이곳에 있다. 실로 신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유적도 다 남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경주 남산이 불교유적과 왕실유적만 있는 곳이 아니다. 경주 일대에서 남산은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기도하러 다닌 기도처요 신성한 산이었다. 그러한 선사시대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곳도 바로 남산이다. 고인돌이 남아있고 성혈이라 부르는 알터도 곳곳에 있다. 뿌리 깊은 민간신앙의 흔적도 많다. 불교 이전에도 신성한 산이었고 조선시대에도 민초들의 기도처였다.

 

경주 시내 서쪽,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형산강 석장동 암벽에는 선사시대 암각화가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제의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다.

 

서악동 삼층석탑은 벽돌로 만든 전탑을 돌로 만들어본 과도기의 탑이다. 지붕이 전탑처럼 계단식이고 기단부는 튼튼하지만 아직 안정된 미감이 부족하다.

 

삼층석탑 옆의 길게 누운 바위 위에는 수많은 구멍이 파여 있는 알터바위가 있다. 그 수가 500여 개에 달한다. 풍요와 다산을 빌던 흔적일 것이다.

 

삼층석탑 뒤의 솔숲에는 신라 4명의 왕릉이 깃들어 있다. 이 능은 진흥왕의 무덤이다. 신라영토를 넓히고 순수비를 네 곳에 세운 바로 그 진흥왕이다.

 

신라 헌안왕릉과 나란히 있는 조선 성종 때의 학자 황정(1426~1497)의 묘. 그는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황정의 묘 앞에 있는 문관석. 표정이 근엄한 문관이라기보다 어린 동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묘소 아래에는 후손들이 1915년에 세운 도봉서당이 있다.

 

경주 남산 틈수골 용장3리 마을에서 어렵게 찾아낸 알터바위. 원래 3기가 있었다고 했으나 나머지는 관리가 되지 않아 없어졌다는 주민의 말을 들었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국가지정 보물이다. 보통 보리사 부처님이라 부른다. 남산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됐고 가장 잘생긴 미남 부처님이다.

 

오똑한 콧날, 입가에 살짝 어린 미소에서 고요히 선정에 들어있는 붓다의 마음을 읽는다. 어디에도 집착이 없고 어디에도 그늘진 모습이 없다. 평화롭다.

 

광배의 뒤쪽에는 약사여래가 선각으로 묘사돼 있다. 어느 세계에서나 중생은 아프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약사여래는 언제나 중생을 위해 나툰다.

 

보리사 마애불이라 부르는 미륵곡 마애여래좌상이다. 양손을 옷 속에 감춘 특이한 마애불이다. 물론 신라시대 작품이다. 꽃공양 하듯 진달래꽃이 피어났다.

 

지금은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이라는 딱딱한 공식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경주 사람들은 할매부처, 감실부처라 불러왔다. 그만큼 친근한 부처님이다.

 

오산계 지바위골의 작은지바위다. 아래에는 사람이 들어가서 앉아 촛불도 켜고 기도도 할 수 있는 작은 단도 있다. 국립공원이 되며 기도객이 뜸해졌다.

 

작은지바위가 있는 계곡 서쪽의 절터 축대다. 얼마나 오랫동안 공력을 드렸는지 그 축대의 흔적이 길게 남아있다. 김시습이 살았던 용장사터만큼 넓다.

 

지암골 3사지 석탑이다. 물론 절 이름은 모른다. 바위를 기단 삼아 석가탑 양식의 탑을 세웠다. 중생들의 바람으로 탑이 땅에서 솟아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큰지바위에 새겨진 조선시대 민불(民佛)이다. 이 바위에는 3기의 민불이 새겨져 있어 아주 옛날부터 기도터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말 거대한 바위다.

 

큰지바위 꼭대기의 큰 알터다. 1995년 처음 찾아왔을 때 찾아낸 기도 흔적이다. 알터가 선사 유적이니 이 바위가 기도처로 받들어진 세월, 아득하다.

 

상사바위 쪽에서 바라본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보통 상선암 마애불이라 불러왔다. 이제 바위에서 막 나오시는 듯 얼굴은 입체고 아래쪽은 선각이다.

 

남산 산신당(産神堂)은 상사바위 모퉁이에 붙어 있다. 아래쪽에 산신당 각자와 이곳에서 빌어 아이를 얻은 이의 후손들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게눈바위는 큰 알터를 큰 뱀이 감싸고 있는듯한 모습이다. 기자대(祈子臺)라고 불려서 아이를 빌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눈바위고개가 해목령(蟹目嶺)이 됐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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