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둘러 절 들러]
길[道]은 여러 갈래입니다. 행복을 찾는 길, 즐거움을 좇는 길, 나아가 깨달음을 구하는 길 등등. 어찌 보면 여행이고 수행이자 순례이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 둘러 길 걸으면서 절에 들러보는 여행이자 순례길을 걷습니다. 발이 젖으려면 물가에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불광미디어가 아름다운 길 찾아 절로 함께 걷습니다. 사진은 아이폰으로 촬영했습니다.
치유의 천년 옛길, 오대산 선재길
선재길은 월정사 일주문에서 전나무숲길, 월정사, 회사거리, 섶다리, 동피골, 상원사까지 이르는 약 10km 거리의 숲길이다. 일주문에서 시작하면 살짝 느낄 정도로 오르막이고, 상원사에서 출발하면 내리막이다. 상원사부터 참배했다. 그리고 선재길을 반대로 걸었다.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든, 일주문에서 출발하든 상원사에서 시작하든 걷기 편안했다.
선재길 적신 가을비와 단풍
달랐다. 선재길이 처음 열릴 때부터 찾았지만, 5~6년 동안 매년 다른 모습을 선물했다. 옛길이 복원되고, 위험한 길목엔 나무 데크를 설치하고, 계곡을 건너는 다리 몇 개 놓이면서 지금의 선재길이 됐다. 찾을 때마다 느낌도 달랐다. 일로만 접했던 선재길은 중간에 돌아오는 길, 가다 만 길,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오는 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오롯이 선재길을 모두 걷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재길은 다른 얼굴을 보였다. 먼저 들른 손님이 있었다. 가을비다. 다행히 걷기 전날 내린 뒤 그쳤고, 개어가는 하늘은 머리 위에, 선재길은 발아래에 두고 느리게 걸었다. 가을비는 선재길 걷는 시간을 더 풍성하게 했다. 가을비가 적신 흙길은 촉촉해서 부드러웠고, 미끄러운 돌길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했다.
예년보다 단풍이 늦다는 소식은 맞았다. 가을 단풍은 느리게 선재길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따듯해진 기후 탓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작년 같은 날보다 단풍이 적네. 그땐 단풍이 정말 많았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가을비로 떨어진 단풍도 제법 많아 흙길이 가을로 흠뻑 젖었다. 10월 10일에 선재길을 찾았으니, 10월 중순이면 단풍이 더 짙어지지 않을까.
다 개이지 않은 하늘 덕에 따가운 가을볕은 없었다. 간혹 볕이 들어도 선재길을 둘러싼 울창한 숲이 만드는 그늘, 약간의 습기, 간간이 거세게 부는 바람으로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면 잠시 멈춰 섰다. 코로나19로 썼던 마스크를 벗고 선재길의 가을 냄새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느리게 걸었다.
소소한 재미있는 핫스팟 눈길
오대산과 선재길의 유래부터 알고 나니 걷는 맛부터 달라졌다.
1. 신라 시대에 중국 오대산을 참배하고 문수보살은 친견한 자장 스님이 문을 연 문수보살 성지가 오대산이다. 2. 문수보살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보살이다. 3. 문수보살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어야 갖출 수 있다. 4.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분이 『화엄경』의 ‘선재(동자)’다.
지혜와 깨달음의 상징인 문수보살처럼 되고자 정진하는 선재동자처럼 이 길을 걸으면서 자신과 마주하라는 얘기다. 그래서 선재길에는 ‘깨달음, 치유의 천년 옛길’이라는 부연이 붙었다. 물론 치유는 하늘이 내린 자연이라는 오대산에서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선재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핫스팟이 제법 많다. 뷰 맛집이다. 상원사에서 2.5km, 월정사에서 6.5km 지점은 발길을 붙들어 세운다. 좁은 길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면 언뜻 한 장면이 스친다. 지금쯤이면 단풍이 장관일 설악산 백담사와 수렴동 계곡의 돌탑이 선재길에도 있다! 비록 돌탑 몇 기에 불과하지만, 잠시 앉아 쉬면서 물멍 때려도 좋다. 조금 더 걸으면 이런 돌탑을 몇 번 더 마주하는데, 쉬면서 바라보는 계곡과 단풍에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힐링이다.
걷다가 불현 듯 만나는 나무부처는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 생명이 다해 쓰러진 나무에 숨을 불어 넣었다. 하종우 작가가 혼을 담아 ‘불(佛)’의 형태로 재탄생시켰단다. 생명이란 윤회를 거듭하기 마련. 시간의 흐름 속에 삶이란 한낱 순간이지만, 그 순간에서 의미를 찾은 부처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핫스팟이 많아 느리게 걷는데 제격이었다. 상원사에서 3.6km 내려오면 ‘오대산국립공원 자생식물 관찰원’이 있는데, 인근에 화장실도 있고 걸터앉아 간식을 먹으며 쉬는 곳이 있다. 바닥에 깔린 붉은 단풍과 초록 침엽수들이 멋지게 어우러졌다. *섶다리는 선재길 명물이다.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낮은 강에 임시로 지은 만든 다리인데, 별칭이 ‘이별다리’다. 왜일까? 여름에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는 10~11월에 다시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겨우내 한 철만 잘 건너가면 그만이다.
*섶다리 :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기둥을 세워서 소나무나 참나무로 만든 상판 위에 섶(솔가지나 작은 나무 등의 잎이 달린 잔가지)을 엮어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다리.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선재길은 스님도 화전민도 혹은 이름 모를 그 누군가가 걸었던 길일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천년 옛길’로서 스님들 얘기가 스며있다. 걷는 의미도 남다르다. 선재길 설명대로 유추하면, 율사로 이름난 자장 스님이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안고 상원사 위 중대사자암을 거쳐 비로봉 옆 적멸보궁 자리에 가지 않았을까.
오대산의 고고한 학, 한암 스님도 선재길을 제쳐두고 중대사자암에 오르진 않았으리라. 경허, 만공, 수월 스님과 함께 선풍 드날렸던 한암 스님은 세수 50이던 1925년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오대산으로 그 자취를 감췄다.
감춘 자취를 좇아 탄허 스님이 같은 길을 걸었다. 22세에 상원사로 출가해, 3년간 말하지 않고 참선하며 15년 동안 오대산 밖을 나서지 않았던 탄허 스님. 스님은 스승 한암 스님과 편지로 법담을 나누고, 선재길 걸어 오대산 상원사에서 출가했다.
인연은 인연을 낳는다. 탄허 스님의 제자 박용열 시인도 이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참전용사이자 실향민이었다. 전쟁 탓에 한쪽 다리가 온전치 못했던 그는 월정사 일을 도우며 살았다. 조실이던 탄허 스님이 그를 거뒀고, 초연(超然)이라는 법명으로 스님으로서 살다 끝내 환속했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의료봉사에 매진했고, 문단에 등단 후 불교를 토대로 시를 썼단다. 그리고 탄허 스님 탄신 100주년을 맞아 시집 ‘오대산 가는 길’도 냈다. 선재길 한 토막에는 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찬바람 불고 서리 오기 전에/ 어디로 갈까/ 걸망 메고 망설이다가// 가부좌 틀어 눈 감으니/ 바로/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내 어찌하여 그렇게도 몰랐을까.”(‘오대산 가는 길’ 중에서)
스님들 얘기만 있을까? 아니다. 오대산에 깃든 화전민의 애끓는 생의 의지도 있다. 선재길에는 40여 가구의 흔적이 남았다. 불을 놓아 풀과 잡목을 태워버린 자리에 밭 일궈 작물을 키웠다. 옥수수와 감자, 콩 등으로 연명하며 벌목 노동의 대가로 쌀을 받았지만, 받은 쌀은 적고 일은 매우 고되 고달픈 삶을 살았다고 한다. 품삯만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숯을 구워서 팔기도 했다. 담장이나 난방 흔적인 온돌 유구 등이 선재길 곳곳에서 발견됐단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오대산에 베어낸 나무를 가공하던 회사(제재소)가 있어 지금도 ‘회사거리’로 불리는데, 선재길에 있다. 이 ‘회사거리’를 지나면 계곡 옆 나무 데크로 만든 길 끝에 월정사가 있다.
도깨비 김신이 찾은 유명 숲길
글도 사진도, 스크롤 압박이 심하다. 그래도 선재길은 얘기가 너무 많다. 월정사를 참배하고 나면 길 따라 곧바로 그 유명한 전나무숲길이 나온다. 2020년 11월호 월간 『불광』 특집 ‘가을·카페·붓다’에서도 소개한 그 길이다.
이 길은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이라 쓰인 현판이 달린 일주문까지 약 1km가 수령 80년을 훌쩍 넘긴 전나무 1,800여 그루가 우거진 숲길이다.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부안 내소사, 포천 국립수목원과 함께 한국 3대 전나무 숲 가운데 하나다. 흙길로만 된 길을 걸으며 전나무에만 시선을 뺏긴다면 수령 600년이 넘은 할아버지 전나무,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내는 핫스팟을 놓치기 일쑤다.
전나무숲길은 tvN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가슴에 박힌 검이 뽑히면 죽는 도깨비 김신(공유)이 검을 뽑아달라며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을 찾아간 장소다. 그리고 “내가 계속 살아있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라며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김신이 고백하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드라마에서 도깨비는 화두 주고 복도 주는 쓸쓸하고 찬란한 신이다. 이런 설명 없어도 예부터 도깨비는 “금 나와라 뚝딱” 한 번으로 우리를 풍족하게 만든 신이다. 그래서 도깨비가 노니는 곳은 명당이라고 하는데, 전나무숲길도 그럴까?
길 양쪽 끝 월정사·상원사
선재길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라고 못 박아 말할 수 없다. 선재길 양쪽 끝엔 월정사와 상원사가 있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선재길을 시작했다면 월정사를, 반대로 걷는다면 상원사를 먼저 참배할 뿐이다.
월정사 산내 암자인 상원사는 선원이 있어 눈 푸른 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신라 성덕왕 4년(705)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었다고 한다. 그보다 상원사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관상>에서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고 의연하게 묻던 배우 이정재가 열연한 역할이 수양대군이고, 훗날 세조다. 세조는 조카를 죽이는 등 살생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많은 불사를 했다. 오대산에서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는데, 피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 고양이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세조가 피부병 치료차 상원사로 가던 중 계곡에서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관대걸이가 상원사 오르는 선재길에 있고, 상원사엔 고양이상과 국보 제221호 목조문수동자좌상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과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근대에는 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와 상원사에서 27년 동안 밖을 나가지 않고 정진한 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건 그렇고!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목, 범종이 걸린 누각 만화루를 지나면서 천정에 문수동자들 벽화와 비천상으로 유명한 상원사 동종(비록 모조품이 걸려 있지만)은 절대 놓치지 않길!
월정사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에 자리한 사찰이다. 자장 스님이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산문을 열었다. 중국으로 유학 갔던 자장 스님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부처님 사리와 가사를 들고 찾은 곳이 오대산이고, 이때 창건한 도량이 월정사다. 이후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한 5만 불보살 신앙이 오대산 전체를 아우르게 됐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오대산 중대(사자암) 1만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대(관음암) 1만 관세음, 남대(지장암) 1만 지장, 서대(수정암) 1만 대세지, 북대(미륵암) 1만 미륵보살. 이렇게 5만 보살이다.
하지만 월정사는 한국전쟁의 불길을 피하진 못했다. 아군에 의해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암자들이 전소됐다. 그런데도 화엄학의 대가이자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른 탄허 스님이 주석하면서 사격을 다시 갖추게 됐다. 탄허 스님의 제자 만화 스님이 적광전을 중건하고, 현해 스님이 대법륜전을 건립하고, 주지인 정념 스님이 도량 곳곳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월정사가 됐다. 최근에는 자연명상마을 옴뷔와 성보박물관 등 전통사찰 영역 밖까지 불사를 끝마치면서 오대산을 찾는 모든 이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는 도량이다.
선재길은 느리게 걸어도 4시간 30분이면 족했다. 도량 참배하는 시간을 빼면 그렇다는 얘기다. 선재길 감상을 떠올리다 보니, <도깨비>에서 김신의 대사 만큼 어울리는 게 없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선재길도 그랬다.
“선재길과 함께한 시간이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걷기가 좋았다.”
선재길 인근 가볼 만한 도량
선재길 끝과 끝 외에도 오대산에는 가볼 만한 도량이 많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물론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 그리고 적멸보궁을 수호하는 암자 중대사자암,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북대의 미륵암 등등.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고도 오대산에 있다. 시간이 된다면 들러볼 만 하다.
중대사자암과 적멸보궁
선재길 끝, 상원사에서 1km 위에 있다. 비스듬한 언덕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중대사자암이 있고, 거기서 비로봉 쪽으로 20분 정도 더 오르면 적멸보궁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대사자암은 적멸보궁을 지키는 암자다. 적멸보궁 참배와 공양물을 올리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에서는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 적멸보궁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불리는 일타 스님이 하루 3,000배씩 절을 하던 곳이며, 엄지를 제외한 오른손, 네 손가락 모두 소신공양한 곳이다.
북대 미륵암
오대산 상왕봉 중턱에는 북대 미륵암이 있다. 해발 1,300m가 넘는 지대에 펼쳐진 울창한 숲은 한국 최대 자생화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다. 상원사 입구에서 큰길 따라 북쪽으로 4km 걸어 올라가야 마주한다. 멀리서 보면 코끼리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상두암(象頭庵)이다.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을 본떠 만든 불상이 1996년에 봉안됐지만, 2010년 북대선원이 문을 닫으면서 미륵불을 모셨다고 한다. 원래는 나한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미래의 주불(主佛)이 될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바뀌었다고 유추하고 있다.
오대산 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로 사적 제37호다. 1606년(선조 39)에 이곳이 물·불·바람의 재화(災禍)를 막을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에 의해 역사서를 보관하기 적절한 곳이라고 해서 건립했다.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 등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타서 모두 없어졌고, 현재 남은 건물은 자료를 통해 복원했다고 한다. 부근에는 역사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사고사(史庫寺)가 있었다. 수호사찰인 월정사가 너무 떨어져 있어, 암자인 영감사가 수호암자라고 한다.
선재길 여정
코스 : 월정사 일주문~전나무숲길~월정사~회사거리~섶다리~동피골~상원사
거리 : 약 10km
시간 : 3시간 30분(편도), 느리게 4시간 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