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여수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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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여수 흥국사
  • 노승대
  • 승인 2021.09.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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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일이 있어 여수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비가 그치고 날씨는 화창해 김포공항에서 여수로 가는 내내 서해안과 여수 인근의 산하를 하늘길에서 내려다보는 행운을 누렸다. 자동차로 수없이 답사를 다니던 길을 하늘에서 조망하며 옛 기억을 더듬노라니 어느덧 여수공항.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듯하다.

여수의 대표 고찰은 단연코 영취산 흥국사다. 봄에는 진달래 축제, 9월에는 꽃무릇(상사화) 산사음악회가 널리 알려졌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나라를 지킨 의승수군(義僧水軍)이 머물던 곳이다. 곧 전함을 타던 승병들의 본부였다.

승병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 전투에 참여했고 용감한 데다 전투력도 뛰어나 종종 돌격장으로서 선봉에 나섰다. 이순신도 승군의 공을 생각해 흥국사의 세금을 면제시켰고 장계를 올려 공을 세운 승병이 포상을 받도록 했다. 『난중일기』에는 승장(僧將)으로 삼혜, 의능, 수인, 혜희, 성휘, 신해, 지원 스님 등의 이름이 나온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둔 뒤에도 스님들은 장군을 잊지 않았다. 아니, 잊지 못했다. 흥국사의 자운 스님은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려 노량에서 쌀 600석으로 수륙재를 지냈고, 순천의 옥형 스님은 여수 충민사 옆에 초당을 짓고 수십 년간 추모 제사를 올렸다. 그 초당이 지금 충민사 옆의 석천사 절이다.

여수는 좌수영으로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내려와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든 곳이고 전쟁에 대비해 착실히 준비하던 고장이다. 당연히 임진왜란 관련 유적이 많고 그중에서도 전쟁이 끝난 후 새로 지은 객사인 진남관은 남아있는 조선시대 관청건물 중 가장 큰 규모로 가로 길이가 75m에 이른다. 국보 제304호다. 그러나 2016년부터 해체복원에 들어가 2022년 말에나 끝날 예정이어서 장대한 규모와 항구를 내려다보는 호쾌한 풍광은 잠시 뒤로 미루어야만 한다. 그 대신 진남관 건너편 고소대에 있는 이순신 장군 대첩비(보물 제571호)와 타루비(墮淚碑, 보물 제1288호)도 꼭 봐야 할 중요한 문화재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에서 보니 서산대사의 시가 떠오른다. “온누리의 집들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네.” 아, 아등바등 사는 인생이여.

 

왼쪽 누런 흙탕물과 삽교천 방조제, 오른쪽의 안성천과 아산만방조제가 보인다 두 물이 합쳐져 아산만으로 들어가고 서해대교와 행담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부안 변산 위에 흰 구름이 한 점 두둥실 떴다. 고찰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과 개암사 울금바위가 머릿속을 스친다. 오른쪽 위로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다.

 

고흥반도의 팔영산이다. 주봉 능선에 8개의 바위가 우뚝해 금방 알아보겠다. 왼쪽 아래 연육교는 고흥반도에서 여수까지 네 개의 섬을 거치며 완공됐다.

 

여수시를 하늘에서 자세하게 내려다보기도 처음이다. 향일암이 있는 돌산도로 건너가는 돌산대교와 제2돌산대교도 보인다. 장군도와 오동도도 찾아진다.

 

흥국사 홍교는 인조 17년(1639) 조성으로 보물 제563호다. 남아있는 홍교 중 가장 길다. 벌교 홍교, 선암사 홍교도 스님들이 조성했다.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숙종 29년(1703)에 조성했다. 당대의 명필 이진휴가 썼다.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관리, 스님, 여성 신도부터 석공들까지 기록했다.

 

흥국사 사천왕은 임진왜란 후인 1645년 경에 조성되고 1805년에 중수한 소조 조각상이다. 용의 여의주를 뺏어 든 광목천왕의 표정이 여유롭다.

 

흥국사 대웅전 용마루 위로 뒷산의 상봉이 살짝 얹혔다. 보물 제396호. 인조 2년(1624) 중창이며 적당한 곡선의 비례와 튼실함이 압권이다.

 

조선 후기 관리들과 서원의 횡포, 역병의 기승으로 민초들의 삶은 더욱 고단했다. 법당을 극락행 반야용선으로 삼으려니 자연스레 축대에 게가 등장했다.

 

축대 귀퉁이 돌에는 거북이도 조각해 놓았다. 바다의 생물들이 노니는 물 위로 법당이 마치 배처럼 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반야용선은 용이 호위하며 극락으로 인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용을 대웅전 중앙계단 소맷돌에 조각해 배를 이끌고 가는 상징으로 삼았다. 조선후기 양식.

 

중앙계단 양쪽에 세운 괘불지주도 물속이라는 상상 아래 기둥마다 용머리를 새겼다. 솜씨가 사납기는커녕 구수하고 털털해 저절로 마음이 느긋해진다.

 

흥국사의 이형 석등이다. 대개의 석등이 연꽃대좌 위에 서 있지만 특이하게 거북대좌 위에 서 있다. 등잔을 넣는 화사석 기둥도 기이한 인물조각상이다.

 

성질 급한 꽃무릇 한 줄기가 올라와 벌써 꽃을 피웠다. 꽃무릇 축제는 용천사, 불갑사, 선운사가 유명하지만 흥국사 꽃무릇도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흥국사 초입의 승탑군. 일렬로 선 승탑들 중앙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 서서 운치를 더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웃음 터진 도깨비 얼굴도 찾아볼 수 있다.

 

고소대 정문. 고소대는 좌수영 성의 포루로서 유사시 포를 쏘는 곳이었다. 장수가 지휘소로 쓰기도 했으며 이순신도 작전계획을 짜고 군령을 내리기도 했다.

 

고소대 비각 안 “통제이공수군대첩비”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비이다. 일제 말기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 묻힌 것을 찾아왔다.

 

이순신 장군이 죽은 뒤 6년 후 좌수영의 군사들이 장군을 추모해 세운 비다. 타루(墮淚)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이 비도 대첩비와 같이 묻혔었다.

 

거대한 진남관은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교사로도 쓰였다. 정면 15칸, 측면 5칸 규모로 기둥은 70개임이 확인됐다. 2023년경에나 만날 수 있겠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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