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북경에서 출가한 신채호와 의열단원 김성숙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불교와 인연 있는 분들은 꽤 된다. 김구가 마곡사로 출가했던 사건, 봉선사에서 출가하여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김성숙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홍범도 신채호가 한때는 출가 사문의 길을 걸었었다.
그들은 어떻게 사찰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몇 명의 독립운동가의 삶 속에 투영된 불교를 바라보고자 한다.
조선의 스나이퍼, 홍범도
그날 밤 산폐를 도망하여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 가서 변성명하고 경기 수원 덕수리가 지담에 상좌로 삭발위승하고 중질하였습니다.
만년의 홍범도가 작성한 「홍범도 일지」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에게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알려진 홍범도는 젊은 시절에 신계사로 출가하여 출가 사문으로의 삶을 2년 남짓하였다.
홍범도는 무엇이 급해서 이름까지 바꾸면서까지 신계사로 들어갔을까?
홍범도는 1868년 8월 아버지 홍윤식의 자제로 태어났다. 홍범도의 삶을 살펴보면 집안은 전형적인 하층 집안이다. 홍범도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젖동냥으로 홍범도를 키운 아버지마저 9살이 되든 해 세상을 등진다.
이후 홍범도의 삶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운 삶이 계속된다. 남의 집 머슴으로 전전하다가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아마 이때 총 술을 배웠던 듯하다.
군 생활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이 20살에 자신을 괴롭히던 장교를 죽이고 그날로 군대를 탈영한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황해도까지 피신한 홍범도는 제지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신계사로 출가
아마도 홍범도에게는 도주의 역마살이 낀 듯하다. 제지 공장에서 주인을 눕히고 다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주인을 눕힌 이유가 주인이 동학에 가입하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890년경, 도망자 신세의 홍범도가 찾은 곳이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였다. 홍범도가 만난 스승은 지담(止潭) 스님이었다. 신계사 생활은 2년 남짓 된 듯하다.
먼저 지담 스님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1880년 신계사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한 기록에 의성과 지담(止潭)이라는 법명이 나온다. 홍범도는 일지에서 지담 스님에 대하여 ‘경기 덕수리가’라는 표현을 쓴다.
‘덕수 이씨’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 임진왜란의 이순신이다. 신계사와 사명당의 인연, 혹은 은사인 지담 스님과 이순신의 관계를 근거로 홍범도의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이라는 애국의식을 연결하는데, 조금은 조심할 부분인 듯하다.
홍범도가 신계사에서 글을 깨쳤을 가능성은 고려할만하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전전했던 홍범도가 군대에서 나팔수와 총 술을 배우면서 글을 배울 수도 있지만, 신계사에서 삶도 그 영향을 고려해 볼 만하다.
홍범도는 신계사에서 아내를 만난다. 홍범도의 아내는 비구니 스님이었다. 신계사에서 만나 정을 나눈 두 명은 아내가 임신하면서 절을 떠나게 된다.
오갈 데가 없어진 두 명은 아내의 고향 북청으로 가던 길에 건달패들에 의해 아내와 잠시 헤어진다. 아내를 다시 만난 홍범도는 두 아들과 북청에서 삶을 시작한다.
홍범도는 포수 생활을 하고 단발령 이후 의병운동에 투신한다. 무장독립운동가로서 홍범도의 삶이 시작된다.
아내와 아들을 가슴에 묻고
봉오동, 청산리 전투 이전부터 홍범도는 일제에 눈엣가시였다. 홍범도는 총 술에 능했다. 개마고원을 주 무대로 하는 의병들의 전투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1908년 봄, 일제는 홍범도를 잡기 위해 회유 협박 작전을 펼친다. 바로 아내와 큰아들을 볼모로 홍범도에게 귀순을 종용하기로 한 것이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신계사에서 비구니로 만나 살림을 차렸던 아내의 말이다. 일제의 협박에 맞서 홍범도의 아내는 당당히 말하였다. 회유 협박을 거부한 아내는 모진 고문을 받고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홍범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홍양순은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아버지를 회유하고자 의병부대를 찾은 아들은 오히려 의병대원이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남짓 뒤인 6월, 함경남도 정평배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사망하게 된다. 차남이었던 홍용환 역시 아버지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 얼마지 않아 결핵으로 병사한다.
아내와 두 아들을 가슴에 묻은 홍범도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노년에 옛 소련의 땅이었던 카자흐스탄으로 옮기어 1943년 10월 이국의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구, 마곡사로 출가
또 다른 도망자가 있다. 홍범도가 신계사로 출가했을 때 보다 조금 늦은 1898년이다.
일본인을 시해하고 감옥을 탈옥한 김구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마곡사였다. 이미 출가를 결심하였던‘이 서방’이라는 사람을 따라 마곡사를 찾은 김구는 ‘원종’이라는 스님으로 변신한다.
이미 한학을 공부했던 김구였기에 천수경, 심경, 서장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견월망지(見月亡指)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忍)’자의 이치를 가르쳐주셨다.”
백범 김구가 생각했던 불교의 모습일 것이다.
출가 사문으로서의 김구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은사 스님과의 갈등일지, 혹은 성격이 괄괄했을 것으로 보이는 성격이 출가 사문으로서의 삶과 맞지 않아서인지 김구는 마곡사를 떠난다. 평양 영천암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다시 세속으로 나간다.
세속으로 나간 김구는 신학문을 인연으로 감리교인이 되었으며 독립운동가로서의 길로 나서게 된다.
도망자에서 출가자로
홍범도가 군인을 시해한 도망자 신세였다면, 김구는 일본인을 시해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홍범도가 제지 공장 주인의 ‘동학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못 이겨 신계사로 출가했다면, 김구는 동학운동에 가담하였다.
홍범도는 가진 것이 없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양친을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다면, 김구는 양반의 자손이었고 과거를 보기도 하였다.
홍범도의 무대는 만주 연해주였고, 김구의 무대는 중국이었다.
그들에게는 도망자 신세로 오갈 곳 없이 사찰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짧은 출가자의 삶을 살았다는 동일한 점이 있다.
(다음 연재에서 계속)
<참고자료>
임경석,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 한겨레21(2018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