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스님들의 과거 시험, 환속하면 관료로
③ 14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스님들
④ 스님들의 신분이 8천이라고? 오해를 넘어서*
인터뷰의 마지막은, 양혜원 연구원의 학위논문과는 직접 관련된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불교를 상상하는 데 몇 가지 고정된 편견을 수정해주는 내용이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시대 승려는 8천이다’라는 이야기이다. ‘과연 그랬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이야기들 나왔을까?’라는 문제이다.
▶ 조선 시대에 ‘스님들을 8천(八賤)이다’하여 천민 취급을 하였다는 의견들이 있어요. 조선 시대 문헌에는 없는 건가요?
그 얘기가 많이 있었는데 그게 승을 신분 범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거든요. 그전에는 사람들이 승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 못 했던 거예요.
승을 8천이라고 보았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라고, ‘이조불교(李朝佛敎)’의 저자인데 그 사람이 이제 조선에 와서 보았던 서울의 불교계에 모습은 굉장히 참담했던 거 같아요.
승들이 굉장히 뭐랄까 저열한 지위, 굉장히 대우도 나쁘고 이랬던 거 같습니다. 여러 가지 모습을 많이 못 받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근거를 가지고 다카하시 도루가 8천이라고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옛날부터 반박이 많이 있었어요. 이능화 최남선도 그렇고 최근에 연구까지 반박하고 조선 시대 문헌에서 8천을 그런 식으로 묶은 예는 없어요.
8천에서 승을 빼고 나머지 7천을 언급하는 예는 있거든요. 승을 포함해서 팔천을 언급한 경우는 없고.
아마 그럴 수는 있죠. 조선 최 말기로 가게 되면, 18세기를 넘어가고 19세기에 가면 사찰의 상황이 굉장히 열악해진 것은 맞았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18세기 균역법이 시행되고 이러면서 사찰로 도망가는 요인이 많이 줄어들어요. 군역가가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도망 안 가고 양인으로 살아도..
오히려 사찰로 들어가면 승역만 이중삼중으로 겪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 제도들이 시행되면서 사찰에서 승려들이 대폭 감소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게 되고, 문 닫는 사찰들을 국가에서 막 돈을 지원해서 살려내고 이런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식의 흐름이 되면서 사찰에 들어가는 수행자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약간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조선 후기, 스님들의 삶
조선 후기 혹은 말기에 개항기 무렵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외국인들의 기행문들을 보면 ‘사찰들에서 아이들을 끔찍이 아낀다’ 이런 기사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걷어서 ‘정말 신줏단지 모시듯이 아이들을 아주 잘 간수하면서 열심히 가르친다. 특히 그중에서 똑똑한 아이들 한두 명 정도는 지극정성으로 고향에서 훌륭한 승려로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이런 기록들이 나와요.
애들이 거기 왜 많은가를 생각해 봤을 때 몇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풍속사에서 거론되는 것은 ‘팔자가 사나워서 액땜으로 출가해야 한다’라고 얘기가 되는 경우, 아니면 어렸을 때 이제 조실부모한 경우, 애초에 고아인 경우,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이렇게 사회에서 갈 곳이 없는 위탁할 곳 없는 사람들이 사찰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은 뉘앙스가 조선 말기에는 아주 많이 있어요.
조선 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평지의 대찰들이 많이 폐사되는 경향을 거치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산속에 있는 궁색한 궁핍한 사찰들이었겠죠?
그런 모습을 보면 신분이 불분명하거나 부모들을 잃어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너무 뻔한 거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사찰의 집단이 사회적으로 굉장히 하류였던 것처럼 보였던 거 같아요.
실제로 18~19세기에 최상층의 엘리트가 사찰로 출가하는 경우는 정치적인 요인으로 도망가는 것밖에 없거든요. 제가 봤던 사료 중에서는 되게 명문가의 사람이 승려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요.
근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밀려나서 갈 곳이 없어서 여기밖에 선택할 수 없게 된 경우에 가게 되는 거고, 최상층 엘리트가 직접 선택해서 사찰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의 사회적 욕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그런 부분들이 외부에서 사찰을 본 그 시각에 큰 영향을 줬던 거 같아요.
상대적으로 출가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도 낮았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 됐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지위가 낮게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죠.
▶ 고려 시대, 왕자와 권문세족의 자제들은 출가를 많이 하죠? 조선 시대에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지는 않았겠죠?
왕실에서 출가하는 경우는 없었던 거 같아요. 이미 유인 요인이 없어요.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전 기록에서 없어졌을 거라고 봅니다.
고려 왕실 같은 경우에는 국가 왕실에서 왕자를 어떻게든 출가를 시키려고 굉장히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던 건데, 그런 흐름이 조선에서는 더 이어지지 않아요.
고려와 조선의 출가 풍조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그런 지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장 신분이 고귀하다고 얘기되는 왕실에서 출가했을까? 출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게 기록에 남지 않고 있고.
최근에는 고문서 관련해서 발굴들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사료라는 것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사료도 그렇고 공식 사료 실록에는 이런 거는 위조 가능한 사료거든요.
실록은 애초에 만들 때부터 후세에 사람들이 볼 걸 염두에 두고 ‘이걸 읽겠지?’ 생각하고 쓰는 것이기에 항상 정도를 지향하는 발언들을 싣는 경향이 있어요. 거기서 불교를 숭상하는 글이 실리는 것은 정말 천부당만부당한 거고.
문집류나 그런 곳에서도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 새로 조상의 문집을 낼 때 승려와 교유했던 시라거나 아니면 승려의 글이 실린 경우에는 깎아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나온 책들을 보면 조선 사회는 이제 굉장히 뭐랄까 개국 당시부터 유교적인 사회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 있죠.
근데 많지는 않지만, 최근에 나오는 고문서 같은 것을 보면 유의미한 자료들이 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나왔던 경북지역에서 나온 고문서인데, 그 집안이 굉장히 관료 출신으로 유명한 집안이에요. 근데 거기서 토지를 상속받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토지 상속자들 쭉 보면 부계와 모계에 전부 출가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고려 후기적인 연장선에서 괜찮은 집들은 무조건 양쪽에 관료와 승직에게 모두 진출시켰다고 하는 얘기들이 이제 문서를 확인되는 것들이거든요.
현실에 기득권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득권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없애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점진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이 한두 세대가 소진된 다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소진되는 시기가 15세기까지 가지 않았을까? 고문서들이 15세기에 나오는 것들은 집안에 승직자들이 꽤 있어요.
정업원이라고 이야기되는, 정업원에서 주지에서 주지로 넘어가는 토지 문서도 얼마 전에 나왔거든요.
상층의 여성들이 사별하고 정업원을 만들어서 거기에 주지를 역임하면서 여성 주지에서 여성 주지로 내려가는 토지들도 나오거나, 근데 그런 식의 기록은 정식 사료 군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전기와 후기
조선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에는 연구들이 많이 진전되면서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는 상당히 다른 사회이다’는 얘기까지 진행이 되었거든요.
그것을 불교사에 입장에서 바라보면 ‘조선 전기는 고려 사회의 유지가 많이 남아 있는 시기였다’까지는 현재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조심해서 말씀을 드려야 되는 부분은, 이것은 불교사 내에서도 입장이 조금 갈립니다. 갈리는데 제 입장은 그래요.
고려 시대의 불교가 높이 있었으면 조선 시대에는 서서히 하강 국면으로 들어가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조선 전기에 전체적으로 확 꺾였다가 조선 후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올라간다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기도 하고.
역사적인 어떤 시간의 단면을 잘랐을 때 흥불이냐 폐불이냐를 논하기는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17세기 초반에 사회적인 단면을 탁 잘랐는데, 예를 들어서 안동 사회의 단면을 잘랐는데 1607년에, 탁 열어 보니까 안동에 사찰이 110개고 운영되는 사찰이 69개다. 그러면 그 사회가 누가 유교적인 사회라고 얘기하겠어요?
그런데 그 시기는 이미 퇴계가 활동하고 안동 사회가 유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던 시기이거든요. 근데 그 숫자로만 봤을 때는 굉장히 흥불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서원은 한 두세 개밖에 없고 해서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는 거는 사실 의미가 없다는 거죠.
시대의 단면을 잘랐을 때 연속성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것인데 다만 이 연속성이 하강 국면이냐, 상승 국면이냐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고.
그리고 이것의 기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이게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불교사를 얘기할 때 흥불이 포인트가 되는 시기를 고려 사회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쉽거든요. 근데 고려 사회는 끝판왕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랑 비교해도 다른 사회가 이길 수가 없어요.
1,000개가 넘는 사찰
이제 조선 사회만 두고 봤을 때 조선 사회가 억불이나 폐불이라고 얘기 하는데, ‘절이 많았네, 숭불인가? 도승제를 운영했네, 억불이네?’ 이런 식의 논의는 사실 의미가 없다는 거죠. 조선 사회를 바라볼 때 기존 전통의 연장선에서 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에 맥락에서 봤을 때 조선 사회는 고려 사회의 유제를 받아 오되, 고려 사회의 그 모습 자체는 버리고 싶어 했어요.
특히 통치 질서의 면에서 봤을 때 예제에 입각해서 통치 질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승록사가 깎여나가는 것은 불교 행정 사상 거의 역대급 사건이라고 판단을 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500년 동안 이어갔던 관청을 내버리고 새로운 불교계를 구축하게 되면서 그리고 불교계에서는 엘리트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기존에 있던 엘리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입멸하고.
조선 최 말기에는 출가자들 대부분의 신분도 천인이라고 인식이 될 만큼 승단이 조금 쇠잔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때 쇠잔했다고 해도 승려 수는 적지 않습니다. 사찰 수도 적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유교가 조선 시대 그렇게 많았다고 해도 서원이 제일 많을 때 1,000개 조금 넘거든요.
근데 사찰은 1,000개 미만으로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전통사찰이 1,000개 넘지 않나요?
그렇게 흥불이나 내지는 불교가 여법하게 굴러갔다라고 얘기했을 때 기준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보는 게 우리가 이제 불교사를 바라볼 때 조금 더 유념해야 할 부분이고
다음에 고려말에서 조선 전기로 넘어오면서 승가를 왜 이렇게 축소하려고 했는가,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조금 유의미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