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 3할이 僧? 14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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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3할이 僧? 14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스님들
  • 김남수
  • 승인 2021.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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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 시대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② 스님들의 과거 시험, 환속하면 관료로
③ 14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스님들*
④ 스님들의 신분이 8천이라고? 오해를 넘어서

그물망이 촘촘하더라도 그물을 빠져 나가는 고기는 있는 법. 법은 항상 예외적인 상황을 만든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승이 되는 자격을 강화시키지만, 이상과 현실은 항상 어긋난다.

도첩제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스님들, 양혜원 연구원의 박사 논문 중 가장 재미있게 읽히는 부분이다.

민의 3할이 승(僧)이고, 실록에는 30만명이 넘는 스님들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들어가 본다.

 

▶ 도첩을 받는 조건이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도첩을 받지 못한 스님들이 많았겠죠?
이른바 무도첩승, 도첩을 받지 않는 스님들도 꽤 많았을 텐데, 국가에서는 여기에도 어떤 대응을 해야 했을 텐데요. 

저는 그것이 조선이 도첩제를 망하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로 생각을 합니다. 조선 전기 기사를 세밀하게 보면 도첩제가 두 가지 트랙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정식 트랙. 필터도 많고 받기도 힘들고 돈도 드는 경국대전 혹은 그 이전에 경제육전 도승조에 올라가 있는 정식 트랙이 하나가 있고요, 또 하나는 이제 약간 변칙적인 방법이에요. 변칙적인 방법인데 이거는 불교계의 수요도 있었지만 애초에 국가 수요가 있었던 문제입니다.

양혜원 연구원

국초에 도성을 건설해야 하고 한양도 세워야 하고 새로이 천도한 수도에서 큰 사찰도 별로 없고 여러 가지 건물들을 중건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의 장인 집단이 사찰에 많이 소속되어 있었어요.

민(民)을 부역시키려면 얘네들은 까다롭거든요. 때를 봐야 하기에. 농번기 피해야 하고 우기 피해야 하고 뭐 피하고 피하고 하면 이게 함흥차사인 거죠. 건물 하나 지으려면.

굉장히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승입니다. 이 사람들을 그냥 공으로 동원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돈을 줘야 하는데. 국가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한테 뭔가 이제 그 비용을 부담해서 이제 건물에 짓게 하는 것도, 건물 짓는 것도 돈이 없어 난리인데, 이 사람들이 일하는 몫까지 줄 수는 없는 거거든요.

 

부역도첩

그래서 생각해 낸 거 중 하나가 부역 도첩이라는 게 있습니다. 부역(賦役)하면, 공사에 며칠 일을 하면 도첩을 주는 거예요. 공사를 할 때는 인원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많이 나갑니다.

처음에는 몇백 장 단위로 조금 나가는데, 나중에 세조 때 이럴 때 보면 어머 어처구니없이 굉장히 많이 나가거든요. 

전부 다 같이 헤아린 수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성종 대에 언급하면서 세조 때에 나간 도첩이 14만 3,000이다’ 이런 얘기를 해요. ‘전국에 승려가 30만인데 도첩이 14만 3,000이 나갔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처음에는 그 수치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다 거짓말이라고 해요. 이것은 과장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봤을 때 조선 초기 경제사 기록을 전부 다 믿으면서 그 수치만 배제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더군다나 과거에 도첩이 나간 경우를 확인해서 다시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승 30만 가운데 14만 3,000이 나간 거는 진짜인 거죠.

14만 3,000명, 엄청나게 많은 숫자에요. 도첩을 이렇게 많이 주는 사례가 없어요. 중국에서도 한 자리 두 자리 이렇게 나가거든요. 근데 14만 장이 왠 말이냐?

이렇게 이야기되는데 그 안에 부역 도첩 같은 것이 끼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것은 가설이지만 그렇게 생각이 돼요.

부역 도첩 같은 경우에는 도승제, 법적으로 도첩을 받는 절차에 끼어있는 필터가 거의 적용되지 않습니다. 어떤 필터만 적용이 되냐면 신분만 적용돼요. 신분도 경국대전에는 뭐 다른 거 없었는데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기서 뭐라 그러냐면 ‘부모가 모두 양인인 것이 확인되면’ 이렇게 나오거든요. 

부계와 모계가 전부 양인이라는 것은 출가 당사자도 양인인 것이 확인되는 거죠. 천구는 아니라는 거죠. 양인이 확인되면 도첩을 주는데 이 확인 절차가 까다롭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거짓말할 수도 있다는 그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거든요.

근데 국가에서는 그런 것들을 확인하지 않고 일단 임무가 급하기에 막 주는 거에요. 공사도 급하고, 그래서 부역 도첩이 많이 나가게 됩니다.

수선전도(首善全圖 조선 후기 제작) 한양을 조성하는데 스님들이 참여하였다.

나중에는 좀 복잡한 얘기지만 호구제나 군역제가 개편되면서 군역가가 되기 비싸져요. 15세기 후반이죠. 도첩 가가 상대적으로 좀 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양인들이, ‘어? 도첩 받으면 군대 안 가도 된대!’ 이러면서 막 도첩을... (웃음) 

그렇게 역전되는 그 시기가 도첩제 망조가 드는 순간이에요. 이후로도 도첩제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이 빗발치면서 결국은 성종 후반대에 가면 새로운 조문이 추가됩니다. 

그러니까 ‘군액(軍額)이 부성(不盛)할 때 도첩 발급을 금지한다’ 이렇게 되거든요. 군액이 부성하다는 것은 무슨 얘기냐면, 군역자의 필요가 많아질 때, 군역자를 많이 뽑아야 될 때는 도첩 발급을 금한다는 거에요.  

군역을 져야 할 사람과 도첩이 발급되는 사람들 대상이 같은 거죠. 한쪽이 빠지면 다른 한쪽은 줄 수밖에 없거든요. 그 조문을 넣으려고 굉장히 오랫동안 싸워요.

성종하고 신하들이 오랫동안 싸우는데 결국은 성종이 물러나서 ‘아 그래? 군액이 많이 필요하면 도첩 발급 금해야지’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록의 뉘앙스를 보면 이제 신하들은 그 조문을 도첩 발급이 금지된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왜냐면 군액은 항상 부성하니깐. 군액이 부족할 때가 어디 있어요? 군액은 항상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도첩은 더 나갈 수 없는 것이지’ 약간 이런 뉘앙스로 받아들이고 있거든요.

군액을 줄일 수는 없는 거니까 도첩을 줄이려고 하는 거죠. 근데 사이드로 자꾸 부역 도첩이 나가니까 신하들 입장에서는 이게 정말 미칠 노릇인 거에요.

아니 이거 지금 시험도 안 보고, 지금 신분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애들한테 도첩을 막 주고 ‘이거 이거 되겠습니까?’ 이렇게 얘길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기사가 막 많아질 때 끝자락에서 ‘이제 도첩 폐지할까요?’ 이런 이야기가 같이 나오고 있다는 게 조선 사회가 변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산성, 숙종 대에 승역으로 조성되었다.

▶ 조선 시대에 스님들이 승역을 많이 졌다고 하죠. 그리고 그것이 불교를 억압하는 또 다른 단면으로 인식되기도 했고, 근데 부역 도첩은 스님들에게 이득이네요?

불교를 스님들을 억압한 것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부역 도첩에 대해서 뭐라고 이해를 해 봤냐 하면, 스님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는 거기 때문에 이게 불교에 대한 억압체제의 일환이라고 이해를 해 왔어요. 근데 저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군역가를 내려면 이게 값이 얼마고 군역을 지려면 이거를 몇 년에 한 번씩 나가고 차출돼야 하는데 이거는 달랑 15일, 20일 치 먹을 거 싸 가지고 가서 일하고 나면, 그리고 일하는 동안 또 이 사람들이 승려이기 때문에 사대문 안에 있는 부녀자들이 하루 멀다 하고 음식을 가지고 온다는 거예요.

바리바리 싸 들고, 공양품에 떡에 쌀에 잘 먹고 일 조금하고 나가면서 도첩까지 받고, 때에 따라서는 도첩만 주는 것이 아니라 승직을 같이 주기도 하거든요. 이 사람들에게 뭐가 필요한가를 얘기할 때 도첩을 주거나 승직을 줘요.

도첩을 주는 것도 유인 요인 중 하나이고, ‘도첩이 있어 오지 안 오면 어떡하지?’ 그럴 경우에 승직을 주면 됩니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직위입니다. 자기 재주 원래 있는 거 조금만 일하면 평생의 역도 면해주고 승직도 받고. 안 하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 이거는 일종의 특혜에 가까운 거에요. 

조금 일하고, 국가 입장에서는 이게 손해 볼 거 하나도 없거든요. 도첩을 주거나 승직을 줄 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니까. 어차피 얘네들 많이 빠질 애들인데, 이거 좀 준다고. 막 주는데. 그것에 대해서 직접 운영하는 신하들 입장에서는 ‘저런 식으로 몇 장 주고 나면 점점 더 많아지고, 이럴 거면 운영하는 법이 뭐하러 필요합니까? 저렇게 주면 안 됩니다’라고 반대를 하는 거거든요.

왕의 입장이나 내지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그런 건설 현장이 입장에 따라 많이 나가는 경우들이 있고 상대적으로 국초에 많이 몰려 있는 경향이 있는 겁니다.

 

▶  무도첩승들을 환속시키거나 역을 지게끔 하는 제도는 제대로 실행이 안 된 거 같아요

현실의 문제인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요. 일단은 도첩제 자체가 법전에 나온 대로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는 문제, 두 번째는 고려 시대부터 고질적으로 지적되는 문젠데 지방관들이 자꾸 봐 준다. 지방관들이 봐준다는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나옵니다. 나중에는 답답하니까 성종이 뭐라 그러냐면 ‘도승제를 더 강화할까? 왜 이렇게 안 줄어?’ 그러니까 나중에 신하들이 ‘지금 도승제도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금강경 심경 살달타를 외우고 정전을 부과하고 다음에 도첩을 신고해서 그거를 살펴서 왕의 윤허를 얻기까지 그런 과정이 그렇게 쉬운 과정은 아니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법 자체는 지금 꽤 엄한데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조영석(1686~1761) 작품. 스님을 소재로 하였다.

지방관이 지키지 않은 문제, 이건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도첩을 확인하려면 지방 단위에서 군졸들이 나가서 도첩을 봐야 할 거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글을 못 읽어요. 도첩을 봤는데 이게 도첩인지 아닌지 구분 못 하는 경우도 실록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이 있고 다음에 이제 승려들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 출가자에 대한 예우 뭐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문제들도 있고, 그다음에 ‘어떤 절에 도첩 검사하러 나간다.’ 그러면 도망가면 되거든요. (웃음)

조선 초기, 15세기 기사에서는 강원도 지역의 도첩을 한꺼번에 검사는 일이 있었어요. 그때 뭐라고 나오냐면 강원도 전 사찰이 공실화 되었습니다. 강원도에 있는 스님들은 전부 다 삼남으로 도망가면 되거든요. 절은 어디로 가건 상관이 없기에 잠깐 비웠다가 도첩 검사 끝나면 올라오면 돼요.

근데 이런 식의 문제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구름처럼 떠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조선 정부에서도 조정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하거든요. 승려의 승적도 작성해 봤다가 세종 때 보면 전국에 있는 승려 명단을 만들어요. 근데 이거 좀 한 10년 즈음 유지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아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포기합니다. 

웃음 짓는 양혜원 연구원

그리고 이거는 불교계에 계시니까 이해를 하시겠지만, 일반 사회에 사는 사람들한테 얘기하면서 이해를 못 하거든요.

고승이라고 했을 때, 누구를 고승이라고 하는가? 사실 신분 좋은 사람이 고승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고승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분이 낮은 자가 출가했을 때 고승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이제 이 사람의 도첩을 내놓으라고 해서 그것을 보기 전에는 이 사람이 어떤 출신에서 나오는 스님인지 알 수 없고, 현재의 존경받는 수승한 승려일 경우에 그 사람한테 도첩을 확인하기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실록에 보면 어떻게 나오냐면 어떤 왕실의 어떤 여인이 굉장히 존경하던 스님이 있었어요. 집안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스님을 모셔다가 그렇게 재(齋)를 지내고 예우를 했단 말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사노비였던 거에요. 도망가서 출가를 한 거죠. 노비 출신이었던 거에요. 

이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피식하고 말 이야기이지만, 이야기가 보여주는 핵심이 뭐냐하면 도첩이라는 것은 이 사람의 외형을 가지고 ‘도첩승이다. 아니다’를 구분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도첩을 굉장히 작게 발급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 도첩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하고 그래서 도첩을 위조하면 관문서를 위조한 영으로 처벌한다는 그런 조항들까지 생기게 되는 거거든요. 근데 개인적으로 깊숙히 넣어 놓고 검사할 때 ‘꺼내 봐!’ 할 때 꺼낼 수 있는 거기 때문에 사실 겉모습으로는 구분하기 진짜 힘들어요.

 

▶ 무도첩승이라고 환속하거나 쫓겨나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무도첩승이라고 해서 절에서 쫓겨나는 것은 본 적이 없고 대신에 무도첩승이 국가에서 걸리면 환속을 당하는 경우들은 왕왕 있어요. 그러니까 도첩을 추쇄(推刷)할 때 도망을 다니는 거겠죠. 

절에서는 도첩을 가진 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승이라는 게 신분이 아니고 양인이면서 승이 된 사람이 있고, 노비이면서 승이 된 사람들 있거든요. 이제 기존의 연구 경향에서는 승 자체를 신분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승은 일종의 출세간의 사회적 집단이거든요. 그들이 세속의 것을 다 버리고 왔다고는 하나 못 버리거든요. 국가 체제가 있기에, 국가 체제에서는 ‘그 사람이 양인인지 노비인지’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잡으려 하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추세하려고 하죠. 절집 입장에서는 점점 출가자가 줄어들고.

조선 시대 승가가 겪는 굉장히 큰 위기 상황 중 하나는 엘리트들이 빠져나간다는 거거든요. 엘리트들도 빠져나가고 절의 살림도 어려워지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절을 막 깨부수는 일은 없지만, 이것은 일종의 쓰리 쿠션 같은 건데 비용을 주지 않는 게 결국은 없애는 거거든요.

거의 2,500개의 사찰에 비용을 주다가 한 40개만 준다는 얘기는 나머지는 어떻게 운영을 하란 얘기야? 그래서 이제 기존의 큰 절들도 없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그런 과정들을 조선 불교계가 겪게 되고 사찰을 운영할 수 있는 재원들이 없는 상황에서 출가자도 이전만 같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이렇게 추세해 가지고 절에서 무도첩승을 쫓아내고 이런 일들은 있었을 거 같지 않고 실제로 사료상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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