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4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오백 나한이 머무시는 성지 누구나 답사길에 자주 나서다 보면 절 어귀에서부터 조바심을 칠때가 한두번이 아닐것이다. 큰 절 작은 암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불사들이 오히려 지금까지 그 사찰이 유지해 왔던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어설퍼진 경우가 자주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엄정하면서도 고풍스런 분위기나 온화하고 다소곳한 느낌을 주는 절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새롭게 대형화된 절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새로운 모습이 그 사찰 주변의 들과 산과 계곡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찰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자 걱정거리다.하기야 이러한 잘못이 어디 불교신도나 스님들만의 탓이랴. 국민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은 상감청자가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쳐 왔지만 우리들은 관리자 | 호수 : 234 | 2009-04-03 00:00 [한국불교 인물전] 호암 약휴대사 ① 선암사 지객스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숭유배불의 정책바람에 소위 양반집 자제와 글장이나 읽었다는 선비들의 코는 높아지고 반면에 죄없는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날로 땅에 떨어져 가서 그들의 발걸음은 인적드문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은 당시 양반사회에 있어서 가장 천한 사람 대접을 받아야 했고 온갖 수모를 참아가야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양반 나그네들은 길을 가는데 가장 중요한 신발(삼과 짚으로 만든)이 필요하게 되면 가까운 절로 찾아가서 새신발로 갈아신고 가는 관습이 생겨 있었다. 할일 없이 이곳 저곳에 무전취식으로 유랑하는 과객이나 일정한 목적하에 여행하는 나그네들은 물론이지마는 가난하고 게으른 선비들은 일부러 절로 찾아가서 낡은 신발을 벗어 김영태 | 호수 : 34 | 2008-01-25 00:00 오늘의 옛 일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철갑 을 두른 듯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볼 수 없고, 천년 솔향 아득했을 삼각산의 모습 또한 찾아 볼 수 없는 오늘이다. 더불어 잊은 것이 어디 그뿐이랴. 천년 솔바람으로 태교를 하던 옛사람들의 멋스런 삶도 잊은 지 오래고 귀하디 귀한 자손 얻고자 이른 새벽 산에 올라 정성 다해 빌었을 조상님네의 순한 마음이며 그 기도처로써, 수행처로써 흠모해왔던 저 산[靈山]에 대한 믿음도 까맣게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오늘이란 바로 내일의 역사일 터!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옛일도 미처 알지 못한 채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기억마저 망가뜨리는 일(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에 미쳐 앞 뒤 가릴 것 없이 달려 들고 있으니 우리에게 과연 내일이란, 역사란 있을까 싶다. 그런 안타까움이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삼각산 중흥사, 태고사 관리자 | 호수 : 336 | 2007-10-02 00:00 남한산성 호법신장이 되어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을 수비하던 군사요충지였다. 이 산성의 축성에 벽암각성(碧岩覺性, 1575~1660) 스님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전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스님들에 의해 3년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하니 스님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성이다. 그래서인가. 산성 곳곳에 쌓아올린 석축, 돌무더기, 굴러다니는 작은 돌 하나도 그냥 보여지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에는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를 비롯하여 장경사 외에 산성 내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의병 본거지로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그나마 장경사는 요사채만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고, 나머지 사찰들은 폐사가 관리자 | 호수 : 394 | 2007-09-11 00:00 처음처음이전이전12끝끝
기사 (24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오백 나한이 머무시는 성지 누구나 답사길에 자주 나서다 보면 절 어귀에서부터 조바심을 칠때가 한두번이 아닐것이다. 큰 절 작은 암자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불사들이 오히려 지금까지 그 사찰이 유지해 왔던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어설퍼진 경우가 자주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엄정하면서도 고풍스런 분위기나 온화하고 다소곳한 느낌을 주는 절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새롭게 대형화된 절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탓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 새로운 모습이 그 사찰 주변의 들과 산과 계곡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찰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자 걱정거리다.하기야 이러한 잘못이 어디 불교신도나 스님들만의 탓이랴. 국민학교 때부터 선생님들은 상감청자가 세계적인 보물이라고 주입식으로 가르쳐 왔지만 우리들은 관리자 | 호수 : 234 | 2009-04-03 00:00 [한국불교 인물전] 호암 약휴대사 ① 선암사 지객스님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숭유배불의 정책바람에 소위 양반집 자제와 글장이나 읽었다는 선비들의 코는 높아지고 반면에 죄없는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날로 땅에 떨어져 가서 그들의 발걸음은 인적드문 산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래서 승려들은 당시 양반사회에 있어서 가장 천한 사람 대접을 받아야 했고 온갖 수모를 참아가야 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양반 나그네들은 길을 가는데 가장 중요한 신발(삼과 짚으로 만든)이 필요하게 되면 가까운 절로 찾아가서 새신발로 갈아신고 가는 관습이 생겨 있었다. 할일 없이 이곳 저곳에 무전취식으로 유랑하는 과객이나 일정한 목적하에 여행하는 나그네들은 물론이지마는 가난하고 게으른 선비들은 일부러 절로 찾아가서 낡은 신발을 벗어 김영태 | 호수 : 34 | 2008-01-25 00:00 오늘의 옛 일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철갑 을 두른 듯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볼 수 없고, 천년 솔향 아득했을 삼각산의 모습 또한 찾아 볼 수 없는 오늘이다. 더불어 잊은 것이 어디 그뿐이랴. 천년 솔바람으로 태교를 하던 옛사람들의 멋스런 삶도 잊은 지 오래고 귀하디 귀한 자손 얻고자 이른 새벽 산에 올라 정성 다해 빌었을 조상님네의 순한 마음이며 그 기도처로써, 수행처로써 흠모해왔던 저 산[靈山]에 대한 믿음도 까맣게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오늘이란 바로 내일의 역사일 터!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옛일도 미처 알지 못한 채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기억마저 망가뜨리는 일(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에 미쳐 앞 뒤 가릴 것 없이 달려 들고 있으니 우리에게 과연 내일이란, 역사란 있을까 싶다. 그런 안타까움이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삼각산 중흥사, 태고사 관리자 | 호수 : 336 | 2007-10-02 00:00 남한산성 호법신장이 되어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을 수비하던 군사요충지였다. 이 산성의 축성에 벽암각성(碧岩覺性, 1575~1660) 스님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전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스님들에 의해 3년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하니 스님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성이다. 그래서인가. 산성 곳곳에 쌓아올린 석축, 돌무더기, 굴러다니는 작은 돌 하나도 그냥 보여지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에는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를 비롯하여 장경사 외에 산성 내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의병 본거지로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그나마 장경사는 요사채만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고, 나머지 사찰들은 폐사가 관리자 | 호수 : 394 | 2007-09-11 00:00 처음처음이전이전12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