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舎衛城)에 들어가셔서 성안에서 걸식하고자 차례로 탁발하고 본래 계신 곳으로 돌아오셨다. 공양을 드신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시었다.” 대승경전 『금강경』 도입부에서 법회가 이뤄지게 된 인연을 설하는 내용 중 일부다.
이 대목을 잘 음미해보면 대승불교의 태동 이후 신격화된 붓다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붓다의 인간적인 모습이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탁월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갈지라도, 자신을 따르는 수행자들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가 탁발해야 생명과 수행을 이어갈 수 있다. 공동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탁발하러 갔지만 아무런 공양도 받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삶을 살아내는 생명들의 진실이다.
특히 “발을 씻고”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깨달은 성자라고 해서 구름을 타고 다니거나 허공중에 떠다니는 존재는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뭇 삶의 모습이 다 그런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은 붓다의 일상을 생생히 묘사하면서 그 성스러움에 관한 종교적 판타지마저 여지없이 깨버린다.
19세기 회화의 혁명’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
서양화 전통에서 바라보면 불교는 일종의 ‘사실주의(Realism)’다. 욕망 속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생기는 뒤바뀐 견해를 붓다는 통렬히 고발한다.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쾌락을 준다 해도 결국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붓다가 깨달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가 잘 말해준다. 어린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를 감행하게 된 동기도, 깨달음의 내용도 모두 뭇 생명의 고통을 응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붓다의 시선에는 세상에 대한 과장된 미화도 진실을 비껴가는 왜곡도 없다. 여실지견(如實知見),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냉철하고 날카롭게 꿰뚫어 본다. 깨달았다고 해서 천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깨달은 자나 구원자 혹은 신격화된 인간이 아닌 바로 이 세상의 뭇 삶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죽음 이후의 내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의 생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현생과 내생의 복을 간구하는 게 아닌, 현생에서 지혜와 자비를 구현할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다. 꿈속도 환상도 아닌 깨어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표현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그 질문에 해답을 해주는 화가가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다.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 대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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