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과 절개로 피어난 지리산 자락 큰 고을,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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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과 절개로 피어난 지리산 자락 큰 고을, 남원
  • 노승대
  • 승인 2023.07.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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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담아둔 절]
광한루

광한루에서 <사랑가>를 읊조리다

지리산의 서북쪽 관문인 남원은 예부터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곧 지리산 쪽에서 전라도 거점도시 전주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이 남원을 거쳐야만 했다. 그 반대로 남원에서는 지리산의 운봉·인월을 거쳐 경상도 함양 땅으로 넘어갈 수 있고 섬진강을 따라가면 구례를 지나 하동에 이른다. 또 순창으로 넘어가면 광주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교통의 요지였던 만큼 큰 도시를 이루었지만 대신 국가의 재난이 닥쳤을 때는 큰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남원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당연히 성춘향과 이도령이다. 실존 인물도 아니건만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남원의 대표 인물이 된 것이다. 드라마틱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광한루가 첫 무대다. 글방 도령 이몽룡이 광한루에 올라 숲속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네를 타고 있는 처녀의 모습을 보고 단번에 반해 수작을 거는 것이 첫 장면이다. 그러니 남원에 와서 광한루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광한루는 국가지정 보물이 아닌가? 광한루는 앞의 연못과 거기에 놓인 오작교와 함께 춘향사, 완월정 등이 함께 조성된 큰 정원이어서 광한루원(廣寒樓苑)이라 부른다. 광한루원은 조선 전기 궁궐에서 완성된 조경문화가 민간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정원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광한루의 역사는 1170년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황공유의 후손인 황감평이 지은 작은 서실 일재(逸齋)에서 시작된다.

후일 그의 후손인 황희(1363~1452)가 태종의 ‘양녕대군 폐위’를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유배돼 내려왔다. 태종이 황희를 미워해서 보낸 것은 물론 아니고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때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 했다. 세종 16년(1434) 남원부사 민여공이 중수했는데 세종 26년(1444) 전라감사로 있던 정인지가 누각에 올라 풍광을 감상하다가 ‘달나라에 있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이곳 아닌가’ 하고 감탄했다는 데에서 광한루 이름이 탄생하게 된다.

세조 7년(1461) 남원부사 장의국이 지리산에서 내려와 남원 앞쪽으로 흘러가는 요천의 물을 끌어들여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은하수에 가로막혀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를 위해 칠월 칠석날의 만남을 상징하는 오작교를 놓았다. 선조 15년(1582)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이 연못 안에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만들었다. 삼신산은 동쪽 바다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의 산으로 영주산, 방장산, 봉래산이다. 각 섬에는 정자도 짓고 배롱나무도 심었다.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을 지은 명문장가로 운치와 멋을 아는 이었으니 이러한 아이디어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15년 뒤 정유재란(1597)으로 남원성은 왜군에게 철저히 짓밟혔고 광한루도 불타버렸다.

광한루를 다시 복원한 사람은 인조 16년(1638) 남원부사로 있던 신감이었다. 지금의 광한루 건물은 이때 복원된 모습을 기본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광한루는 연못을 앞에 두고 남향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오작교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다. 누각 1층의 기둥을 보면 남쪽에 일렬로 서 있는 기둥들은 전부 2층 마루 높이까지 닿는 돌기둥으로 되어 있다. 모서리 기둥들도 같은 방식이다. 다른 기둥들도 자세히 보면 반쯤 높이까지 돌기둥으로 한 것도 있고 나무로만 세운 기둥들도 있다. 비가 많은 남쪽 지역인 것을 감안해 돌기둥들을 적절히 배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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