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를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두 사찰 모두 오랜 역사를 쌓아온 자취가 배어 있어서 차근차근 살펴볼 곳도 많지만 들고 나는 숲길만으로도 자연 힐링이 되는 곳이다.
특히 포장이 안 된 선암사의 숲길은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명소가 돼 있었다.
송광사는 국보 4점과 보물 13점을 보유한 중요사찰이지만 이외에도 사찰경내 곳곳에 살펴볼 것들이 숨어 있다.
그런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사찰을 찾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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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 암벽의 윤웅렬(尹雄烈, 1840~1911) 각자. 윤웅렬은 1896년 관찰사로 왔을 때 왕실 원당인 축성전 보수를 주도하며 700냥을 시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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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의 동생 윤영렬의 손자가 바로 윤보선 대통령이다. 1899년 남여혁파 각자는 스님들이 송광사로 유람온 관리의 가마 매는 것을 금한 칙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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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고종, 민비, 세자의 수복을 빌기 위한 축성전을 사찰경내에 짓게 되자 다음 해인 1867년에 하마비를 세웠다. 가마나 말에서 내리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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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李範晉, 1852~1911)은 순천부사로 재직할 때 축성전 건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일합방 후 자결, 그의 아들이 헤이그 특사 이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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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루 홍교 아래의 공복(蚣蝮)은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물을 따라 들어오는 악귀를 막아준다. 철사에 매달린 동전은 다리공사 후 남은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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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공사 시주금으로 받았으니 오직 다리 보수비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쓰면 호용죄(互用罪, 어떤 목적을 위해 보시받은 돈을 다른 데 사용한 죄)가 된다. 우화교 안쪽 해강 김규진과 죽농 안순환의 합작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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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대웅전 구역은 한국전쟁 때 국군의 방화로 타버린 후 작은 법당으로 재건했다가 1988년 108평으로 중창했다. 목수 신영훈과 최완수 선생이 참여하여 완성도 높은 건물이 됐다. 평면 12각형의 건물로 외관부터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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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법당 앞에는 파초를 많이 심었었는데 이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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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간의 뒤뜰 풍경. 안쪽은 반찬을 만들던 채공간이었고 2층은 곡물, 먹거리를 저장하는 창고였다. 기계가 없던 시절, 저 돌절구에 다 찧고 갈아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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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초입에 간간히 풍겨오는 향기로운 바람, 바로 만 리를 간다는 만리향의 향기였다. 본 이름은 금목서고 흰색 꽃나무는 은목서, 천리향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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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은 원래 성수전(聖壽殿)으로 고종이 51세가 되자 장수를 빌기 위해 세운 건물이었다. 왕은 51세가 되면 70세에 들어가는 기로소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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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수전은 한일합방으로 빛을 잃었고 앞에 있었던 관음전이 퇴락하자 전각을 헐고 관음보살상을 성수전으로 옮긴 후 관음전 현판으로 바꿔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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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내부 아래쪽 벽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셨던 중앙을 향해 정1품 이하 고급관료들이 좌우로 벌려 서서 홀을 들고 읍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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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암 아래에 있는 하사당은 보물 제263호로 조선 전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부엌 칸 지붕 위로는 사각의 맞배지붕 기와를 얹은 환기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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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 중에서 송광사 해우소만큼 특이한 화장실도 없을 것이다. 연못 중앙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면 ‘T’자형 화장실 입구다. 문도 연꽃봉우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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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한 모퉁이에는 계곡물이 계속 들어오니 비단잉어가 유유자적 노닌다.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선암사 해우소처럼 문화재로 지정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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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경내에 있는 보조국사감로탑이다. 보조국사(1158~1210)는 불교계가 출세 위주의 풍토로 변질하자 수행 위주의 가풍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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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국사비는 1213년에 사찰 경내에 세웠다. 이 비도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들어와 훼손했으며 1678년에 중건했다. 1687년에 부도전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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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승탑들은 사찰의 뒤쪽 산록에 안치했고 송광사는 지금까지 그 법도를 지키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여염의 효자각처럼 사찰입구로 승탑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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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승탑들이 모여있는 곳에 보조국사탑과 같은 양식의 승탑도 있다. 이 송광사 부도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승탑을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