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족] 붓다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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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족] 붓다의 귀향
  • 이학종
  • 승인 2024.04.26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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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大覺 후 6년 만의 첫 귀향
아잔타 석굴에 그려진 붓다의 귀향 장면(오른쪽). 붓다 옆으로 야소다라와 라훌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불광미디어

붓다의 귀향은 큰 깨달음을 이룬 뒤 6년째 되던 해에 이뤄졌다. 깨달음을 이루기 전 6년 동안의 수행 기간을 포함하면 고향을 떠난 지 12년 만이다. 이때 붓다는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ājagaha) 외곽의 만꿀라 언덕(Mankula Pabbata)에 머물고 있었다. 

붓다는 출가라고 하는 ‘위대한 포기’를 결심하는 과정과 마침내 출가를 결행하는 순간 아내 야소다라와 부왕 숫도다나(Suddhodana), 양모 고따미(Gotamī) 등에게 자신의 출가가 결코 혼자만의 이익과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 바 있다.  

‘수행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아들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듣고, 아버지는 ‘제발 가문을 생각하라’며 강하게 만류했다. 붓다는 아버지에게 영원히 젊음을 누리게 해준다면, 병들지 않고 영원히 건강하게 해준다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준다면 출가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의 굳은 의지를 피력했다. 

출가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냐는 아버지의 원망과 분노에 대해서는 ‘출가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고뇌인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 그리고 슬픔과 번뇌에 묶여 있는 재난을 알고 안온한 열반을 구하기 위한 것이며, 해탈의 길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고뇌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말은, 곧 대각(大覺)을 이뤄 붓다가 된 뒤에 고향을 찾아와 해탈의 길을 석가(Sakya)족에게 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붓다의 귀향은 그 시기가 언제일지의 문제일 뿐 예정된 것이었다.  

 

영웅의 귀환

싯다르타가 오랜 고행을 끝내고 대각을 성취해 붓다가 됐으며, 그의 가르침이 신흥강대국인 마가다국에서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고, 까시(kāsi)국 등에서도 크게 확산되고 있다는 소문이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도 전해졌다. 특히 중인도를 장악하고 있는 강력한 통치자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붓다에게 귀의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는 소문은 석가족 모두를 기쁘게 했다. 까삘라왓투는 꼬살라(Kosala)국의 지배 아래 있던 일종의 속국이었기에 그 기쁨은 더 컸다. 

석가족의 긍지와 자부심은 마치 보름 무렵 사리 때의 조수처럼 불어났다. 숫도다나왕을 비롯한 석가족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석가족의 아들 붓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들에겐 붓다가 대각을 이룬 후 6년이 되도록 자신의 고향을 찾지 않는 것에 내심 실망감도 있었다. 특히 숫도다나왕은 석가족의 명예를 세상에 드날린 자랑스러운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모든 이들에게 찬탄과 존경을 받는 아들이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와 가슴속에 응어리진 원망과 슬픔을 풀어주길 바랐다. 

숫도다나왕은 아들을 초청하기 위해 라자가하로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었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라’라는 왕의 전갈을 전하기 위해 라자가하로 떠난 사신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무려 아홉 명의 사신을 보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사신들은 위대한 성자가 된 붓다를 만나고 나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출가해 비구가 됐다. 숫도다나왕은 마지막으로 가장 신임하는 재상의 아들이자, 어린 시절 싯다르타의 소꿉친구였던 깔루다이(Kāludāyī)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들을 데리고 오라’는 간곡한 당부와 함께 라자가하로 보냈다. 

두 달여에 걸친 오랜 여정 끝에 붓다의 수행처에 도착한 깔루다이는 수많은 비구와 붓다의 설법을 듣는 재가 수행자들의 끝없는 물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거의 매일 붓다를 찾아와 최고의 예를 올리고 설법을 경청하는 빔비사라왕을 보면서 붓다의 위대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감히 붓다 앞에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설법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던 붓다가 깔루다이를 발견하고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를 물었다. 깔루다이는 붓다를 까삘라왓투로 초청하기 위해 숫도다나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며 지금이 고향을 방문하기에 적절한 때이니 고향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붓다의 생각은 달랐다. 자존심 강한 석가족들이 마음을 열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붓다의 귀향 목적은 가족과 친지, 동족을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었다. 

“깔루다이, 내가 까삘라왓투로 가는 것은 아직 이르다. 조금 더 기다리도록 하자. 이번 우기가 끝나면 우리 모두 함께 갈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깔루다이로부터 가족들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오랜 친구를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법했다. 가야 할 길을 비로소 발견한 깔루다이는 붓다의 허락을 얻어 출가했고,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며 정진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아라한이 됐다. 그는 붓다에 이어 깨달음을 얻은 두 번째 석가족 출신 비구가 됐다. 

우기가 끝나갈 무렵 붓다는 제자들을 소집해 까삘라왓투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깔루다이는 며칠 먼저 고향으로 출발했다. 라자가하에서 까삘라왓투까지는 약 67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까삘라왓투에 도착한 깔루다이는 숫도다나왕을 찾아가 붓다의 귀향 소식을 알렸다. 그는 붓다의 출가 제자가 2만여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 곳곳에 크고 작은 승원이 세워지고 있는 이야기, 대국의 왕은 물론 수많은 브라만이 붓다에게 귀의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이야기 등 붓다의 근황도 전했다. 

숫도다나왕을 비롯해 그의 가족은 물론 석가족 전체가 술렁이며 붓다의 도착을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다. 숫도다나왕은 까삘라왓투 근교의 니그로다 숲에 붓다 일행이 머물 공회당을 서둘러 마련했다. 마침내 60여 일의 긴 여정을 거쳐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까삘라왓투에 도착했다. 숫도다나왕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석가족 출신 영웅의 귀환에 끝 모를 기쁨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향인 까삘라왓투. 까삘라왓투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네팔(왼쪽)과 인도(오른쪽)에서 각각 주장한다. 두 지역의 거리는 16km로 네팔에는 성곽 유구가 남아 있고, 인도에는 사리를 봉안했던 탑이 있다.

 

친족과의 만남 

붓다는 부왕이 마련해 놓은 공회당에서 친족들과 첫 대면을 했다. 붓다는 모든 것을 보시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얻은 자신의 전생 이야기를 설했다. 그리고 자존심이 지나쳐 자만심에 물든 친족의 모습을 보며 우선 그들의 교만부터 조복 받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그들이 참 진리를 수용할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붓다는 발우를 들고 비구들과 함께 탁발에 나섰다. 까삘라왓투의 주민들은 한때 태자였고, 이제는 석가족의 영웅인 붓다가 이집 저집 구걸 다니는 모습에 충격받았다. 소식을 접한 숫도다나왕이 급히 거리로 좇아 나왔다. 왕은 아들에게 ‘궁 안에 충분한 음식을 마련해 놓았는데 왜 길거리에서 밥을 비느냐’며 크샤뜨리아 혈통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붓다는 ‘나의 가계는 디빵까라 붓다 이래의 불계(佛系, 부처의 계통)’임을 분명히 한 뒤, 부왕의 공양 초청에 응해 궁으로 들어갔다. 

붓다는 식사가 끝날 무렵 숫도다나왕과 양모 고따미를 비롯 석가족들에게 존재의 세 가지 특성, 즉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에 대해 설법했다. 이어 탐욕과 악의와 미혹을 제거함으로써 마치 흙탕 속에서 자라난 연꽃이 물 밖으로 솟아 더러움에 젖지 않듯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특히 붓다는 ‘자제하라. 방일하지 말라’라는 시를 읊어서 아버지를 ‘흐름에 든 경지(수다원須陀洹)’에 들게 했고, 이어 ‘선행의 원리를 행하라. 악행의 원리를 행하지 말라’라는 시를 읊어서 양모 고따미를 ‘흐름에 든 경지’에, 그리고 아버지를 ‘한 번 돌아오는 경지(사다함斯陀含)’로 이끌었다. 설법이 끝나자 왕족들이 차례대로 나와 붓다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올렸다. 

붓다는 이어 그 자리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야소다라(Yasodharā)를 찾아,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만 대동하고 부왕의 안내를 받아 처소로 향했다. 12년 만에 옛 아내를 만난 붓다는 야소다라의 전생 이야기(「칸다 낀나라 자타까」), 즉 독화살에 맞아 쓰러진 남편을 신들이 내린 신약으로 살려낸 아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녀와 자신의 인연이 아주 오랜 전생부터 이어진 것임을 밝혔다. 

 

석가족의 귀의(歸依)

다음 날 아침 붓다를 친견하기 위해 왕족을 비롯한 많은 석가족 사람들이 니그로다 정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찾아온 원로들은 남루한 비구들을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외면했다. 

그들은 ‘저들은 거지 떼와 다름없다. 깔루다이가 그 잘난 혓바닥으로 우리를 속였다’며, 붓다라고 해도 동생뻘 또는 조카나 아들 손자뻘인데 예배할 수 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붓다는 개의치 않고 그들에게 차례대로 베풂과 건전한 삶에 대한 이야기, 욕됨을 참는 삶에 아름다운 과보가 따른다는 이야기, 하늘 세계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 욕망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유연해지자 붓다는 방편을 들어 그동안 개척해온 경이로운 삶의 경험을 들려줬다. 붓다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는 근심과 집착의 본질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을 극복하는 방법이며,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 그들이 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인도하겠다고 역설했다. 그때서야 석가족 사람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법문을 마음 깊이 간직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날, 붓다는 석가족 최고의 미녀 자나빠다깔야니(Janapadakalyāṇī)와 결혼하려던, 유약하고 이기적인 성정의 이복동생 난다(Nanda)를 반강제적으로 출가시켰다. 붓다는 동생을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것과 함께, 배려가 부족한 난다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석가족 전체가 불행해질 것을 염려했다. 

붓다가 까삘라왓투에 온 지 7일째 되는 날, 야소다라는 라훌라에게 아버지를 찾아뵙고 유산을 물려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시켰다. 붓다는 유산을 달라는 라훌라의 말에, 아들을 출가시키기로 마음먹고 사리뿟따를 불러 출가를 이행하라고 일렀다. 물질적 유산은 대부분 자녀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므로, 아들에게 일곱 가지의 재산, 즉 믿음·계행·악행을 두려워함·악행을 부끄러워함·법문을 들음·보시·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했다. 이렇게 라훌라는 붓다가 이끄는 상가의 첫 번째 사미(구족계를 받기 전의 남성 출가자)가 됐다. 

붓다가 8일간의 까삘라왓투 일정을 마치고 다시 라자가하로 돌아갈 준비를 서두를 때, 양모 고따미가 깨끗하게 싼 한 벌의 가사를 들고 찾아왔다. 붓다는 개인이 아닌 상가(Sangha, 승가)의 이름으로 가사 공양을 허락했다. 또 서둘러 찾아온 야소다라의 아버지이자 꼴리야족의 왕 숩빠붓다(Suppabuddha)에게 세속에 사는 재가자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설했다. 믿음, 정진, 알아차림(사띠), 마음집중(사마디), 지혜(빤냐) 등 행복을 성취하는 다섯 가지 기둥을 늘 간직하고 점진적 수행의 인내를 갖추라고 당부했다. 

이어 점진적 수행의 인내를 이끄는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선지식의 말에 자주 귀 기울일 것, 둘째 교의가 애매모호한 것인지 경험에 근거한 것인지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한정된 것은 아닌지 보편타당한 이론인지 성자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는지 점검할 것, 셋째 제자들의 행실이 고결하며 솔직하고 바른지, 청정하게 살면서 이웃에 봉사하고, 훌륭한 도의의 모범이 되고 있는지 점검할 것, 넷째 자신의 도덕적 자세를 비판적으로 숙고할 것, 다섯째 자신의 착하고 관용적인 자세를 비판적으로 숙고할 것 등이었다. 

이 밖에도 붓다의 귀향은  아난다(Ānanda)를 비롯해 아누룻다(Anuruddha), 밧디야(Bhaddiya), 바구(Bhagu), 데와닷따(Devadatta), 낌빌라(Kimbila) 등 석가 왕족 청년들과 훗날 율장 결집을 주도한 이발사 출신 우빨리(Upali)가 출가하는 계기가 됐다.  

 

4차례의 귀향

붓다가 출가 후 고향 까삘라왓투를 방문한 것은 모두 네 차례에 이른다. 깨달음을 이룬 지 6년째 되는 해에 첫 방문을 했고, 그 이듬해 석가족과 꼴리야족 사이에 물싸움이 벌어졌을 때가 두 번째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숫도다나왕의 임종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방문한 것이 세 번째다.

첫 번째 방문 때 왕족들의 출가가 잇따랐고, 두 번째 방문 때 석가족과 꼴리야족 각 250명씩 총 500명의 청년이 출가했으며, 세 번째 방문 이후 고따미를 필두로 500명의 여인이 힘겨운 과정을 거쳐 출가했다. 이처럼 세 번의 방문을 계기로 일어난 공통된 결과는 친족들의 집단 출가였다. 

마지막 4번째의 방문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지 42년째 되던 해였다. 석가족의 처녀들은 석가족을 괴멸시키기 위해 복수심으로 출정한 꼬살라국의 위두다하(Vidūdabha)왕에게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붓다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인과법문을 설하기 위해 니그로다 숲을 찾았던 것이다. 

이처럼 붓다의 네 차례에 걸친 고향 방문은 공히 핏줄에 대한 인간적인 애틋한 마음과 함께, 친족들을 파멸의 길인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길인 해탈의 길로 이끌기 위한 대자비심의 실천, 그 자체였다. 

 

이학종
불교전문기자로 30년 동안 일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저서로 『산승의 향기』, 『선을 찾아서』, 『돌에 새긴 희망』,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 『붓다 연대기』, 동화 『효녀 영랑』 등이 있다. 2010년에는 시(詩) 전문지 <유심>을 통해 등단했다. 2014년 ‘미붓아카데미’를 설립해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불교 안의 과학, 과학 안의 불교’ 등의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열어 불교계에 인문학 열풍을 선도했다. 2017년부터 충남 당진시 면천면 대치리로 귀촌해 농사와 글쓰기, 사념처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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