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해야 할 바를 다 이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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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 해야 할 바를 다 이룬 사람
  • 강대현
  • 승인 2021.08.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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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과 속俗 잇는 영원한 성자
옥천사 나한상, 벌나파사 14존자, 조선후기, 나무.

번뇌 끊고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불교 수행자를 사문(沙門, śramaṇa)이라 부른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사회 계층 제도가 느슨해지기 시작하자 새롭게 등장한 인도의 수행자들을 일컬어 사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신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한 기득권 종교 브라만교와 대립하는 사상을 설파하면서 상가(saṃgha, 僧伽)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했다. 이처럼 사문들은 브라마나(brahmaṇa) 전통을 이어 발전한 힌두교에 대한 반(反) 브라마나적·비(非) 전통적 경향을 주창했고, 이런 사문들에 의해 일어난 사상적 양상이 불교이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사문들에 의해 인간중심사상의 발전을 촉발했고, 동시에 신흥 종교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무명(無明)을 벗고 성자(聖者)가 될 기회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의 모습을 획일적으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고타마족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와 이후 수행으로 해탈에 이른 성자로서 석가모니 붓다(이하 붓다), 아비달마 불교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깨달음 단계에 대한 구분, 그리고 기원 전후부터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대승불교의 성불(成佛) 등 그 양상은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붓다의 깨달음을 닮는 것’과 ‘나도 또 다른 붓다가 되는 것’의 차이다. 즉 붓다의 일거수일투족을 표준으로 삼아 수행 정진하여 제2, 제3의 붓다가 되는 초기불교와 갖가지 방법의 수행으로 나 자신도 별도의 붓다가 될 수 있는 대승불교의 차이는 불타관(佛陀觀)과 불신론(佛身論)의 차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자 경지에 오른 초기불교 수행자

그렇다면 붓다를 닮아 최고의 성자 경지에 오른 초기불교 수행자들은 누구였을까? 붓다 이전부터 인도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이들을 아라한(나한, arhat)이라고 했다.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 이들이 도달하는 경지를 말하는 사향사과(四向四果), 즉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가운데 최고 경지이면서 최후 단계가 아라한이다. 즉, 아라한은 불교 최초의 아라한이었던 붓다를 표준으로 삼아 수행해온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 최고 수준의 수행자로, 더는 배우고 수행할 것이 없는 존재이면서 윤회에서 완전히 해방된 존재이기도 하며, 그 이상의 단계가 없으므로 당시 깨달음의 최상위에 있었던 붓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상가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초기불교에서 아라한은 수행자로서 최고의 단계를 의미한다. 이들은 중생교화를 위한 설법의 의무 또한 당연히 부여된 승속(僧俗)을 막론한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으며, 석존 입멸 후에는 세간의 실질적 지도자이면서 승단의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상좌부 전통에 따르면 해탈 열반한 성자(ārya)를 아라한, 벽지불(辟支佛), 불타(佛陀)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는데, 여기서 아라한은 모든 고(苦)를 멸한 사람이면서 행(行)해야 할 모든 일을 행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애욕의 최후 흔적이 소멸한 순간에 생기는 멸(滅)의 인식과 멸의 인식을 얻은 후에 더는 미래에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불생(不生)의 인식을 하는 자가 바로 아라한이다.

이즈음에서 불교 최초의 아라한이었던 붓다의 예를 들어 아라한의 양상을 살펴보자.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성도한 바를 설하면서 그 설법의 가치와 목적을 『장아함경』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법을 설하겠다. 이 법은 수승한 이치이며, 수승한 범행이며, 수승의 안온(安穩)으로 마침내 열반으로 들게 한다. 나의 설법대로 행하는 자는 유루에서 벗어나 무루를 이루고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에 이르러 스스로 행하여 마침내 체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생사를 이미 여의었고, 청정행도 이미 이루었으며, 해야 할 바도 이미 다 하였으므로 다시는 몸을 받지 않음’이다.”

붓다의 설법 가운데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생사를 이미 여의었고, 청정행도 이미 이루었으며, 해야 할 바도 이미 다 하였으므로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이를 행간을 바꾸어 객관적으로 나타내보면 ‘나의 생은 이미 다했고[我生已盡], 청정행도 이미 이루었고[梵行已立], 해야 할 바도 이미 다 하였으므로[所作已辨],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는 사구(四句)의 게송이 된다. 이 게송은 초기불교 깨달음의 경지에 관한 서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형구로, 붓다로부터 유래한 이후 수행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했을 때 자신이 스스로 송출하는 게송이다. 그리고 이 순간 아라한의 양상을 『대비바사론』에서는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는 두 가지 의미를 갖추게 된다. 하나는 과(果), 즉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계[界], 즉 무색계(無色界)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정형구에 대해 일본의 사토요시히로(佐藤義博)는 “불교성전에서는 유형화된 정형구가 반복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소 지루한 느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형구는 전통적인 것을 표명하고, 또 불전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절대 그 가치를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그러한 정형구는 일시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정형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붓다가 처음부터 그러한 사구의 게송을 정형화하여 송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설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그 형식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고, 붓다 입멸 후 수차례의 경전결집 과정에서 정형화된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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