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선업善業을 쌓다 |
올해 우리나라 평균 퇴직 연령은 55세입니다. 향후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든 사람들의 화두가 됩니다. 은퇴의 연령은 낮아졌지만 평균 수명은 증가하는 우리 세대. 은퇴 후의 시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불광이 만난 불자 은퇴자들은 언제나 활기 넘쳤습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삶을 주도하기에 누구에게도 소외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당당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알차고 여법했습니다. 은퇴 후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불자는 어떻게 은퇴 이후의 계획을 세우면 좋을까요. 설레는 인생 2막,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에게 선업을 쌓는 이들을 만나봅니다. 01 교편 내려놓고 전통등 만드는 이정희 불자 김우진 |
“불교를 만났기에 제 삶은 항상 늘 새롭습니다”
아버지는 환갑잔치를 마치고서 홀연히 먹물 옷을 입었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일 때였다.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불교에 귀의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까. 그래서 시작한 불교 공부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 그는 포교사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조계종 포교사 3기이자 전문포교사 1기, 보명사 불교대학의 부학장으로 불교 강의를 하고 있는 정광성(67, 일지) 포교사의 이야기다.
| “저는 포교사입니다”
정광성 포교사는 32년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2014년에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후 지금은 불교대학에서 강의하며, 포교사로서 왕성히 봉사를 한다. 은퇴 후가 더 찬란한 그의 아이덴티티는 ‘포교사’다. 그가 불교 공부에 매진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불교와는 가까웠습니다. 아버지는 4대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기도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는 그 옛날부터 불교신문을 봤습니다. 불서도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저희 3형제를 모두 결혼 시키고 나서, 환갑잔치를 한 그해 가을에 갑자기 출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담보로 절을 사셨습니다. 어머니가 굉장히 고생 많이 하셨죠. 제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그땐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원망은 한 의문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떤 가르침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머리를 깎았을까, 그 정도의 결심을 갖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읽던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출가 후 3년째 되던 해, 중학교 3학년 담임일 때였다. 고입원서를 쓰기 위해 부모님과 면담해야 하는데 유독 한 학부모를 만나기 어려웠다. 원서 접수 전날까지도 오지 않아 연락하니 대학을 다니느라 바빴다고 했다. 불교대학이라 했다. “그래요? 그런 대학도 있습니까? 그럼 저도 소개 시켜주십시오.”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매주 주말마다 서울 한국불교대학을 통학했다. 서울과 천안을 왕복하며 공부했다. 아내는 토요일 새벽마다 꼬박 아침상을 차리며 공부를 도왔다. 그렇게 다닌 것이 7년이었다. 1990년부터 시작된 서울행은 불교대학 2년, 대학원 2년, 삼장법사 3년 과정까지 이어졌다.
“배우면 배울수록 눈이 트이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와 닿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빠지지 않았어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때는 국영수를 제외하고는 다른 과목을 별로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인간 경영이라든지, 지혜로운 삶을 사는 방법이라든지요. 어찌 보면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불교를 배우고, 불교대학을 다녔던 것 같습니다.”
| 은퇴 후가 더 바쁜 삶
삼장법사과정까지 졸업한 이듬해, 1998년 3기 조계종 포교사가 되었다. 천안 지역에서는 1호 포교사였다. 첫 포교 대상자는 아내였다. 아내도 한국불교대학 천안지부와 각원사불교대학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본격적으로 포교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멈추지 않았다. 2004년에는 포교사전문아카데미를 수료, 2005년부터는 포교사 대학원을 다니며 2008년 제1기 전문포교사 품수를 받았다. 공부한 기간만 도합 11년이다. 누구보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신 부처님께 고마웠다.
“포교사가 되고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천안지역 1호 포교사였기에, 천안이 아닌 경기지역단에서 활동해야만 했습니다. 각원사 신도모임 자비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도반들과 함께 포교사 준비를 했어요. 2004년, 각원사 불교대학에서 다섯 명의 포교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들과는 함께 합숙도 했다. 스님과 함께 절에서 합숙하며 불교를 공부하고, 불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토론했다. 드디어 포교사 천안지회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초대 천안지회회장을 맡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가 있다면 어디든 갔다. 각원사 중고등부 학생회 지도교사로 계층포교에 힘쓰는 것부터, 염불 봉사, 군포교, 교도소 법회는 물론이었다. 사찰문화 해설, 포교사단 신규포교사 지도강의, 천안서부역 무료급식 자원봉사 등까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팔을 걷었다. 천안지역 군법당에 포교사들이 투입된 것도 그의 역할이 컸다. 2005년 군포교팀을 개설해 제3탄약창 군법당에 법회 지원을 나갔다. 같은 해 공군, 해군 군법당에도 포교팀이 투입됐다. 그는 지금도 매주 제3탄약창 법회와 제11탄약창 법회에 나가 군포교에 앞장선다.
그는 대전충청지역 포교사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사찰문화해설 총괄팀장, 충남지역단 동부총괄팀장, 대전충청지역 지역부단장, 9대 지역단장 등, 포교사로서 많은 소임을 살았다. 이런 역할들을 인정받아 2005년에는 조계종 포교원장 표창과, 대전충남포교사단장 표창을, 2017년에는 포교원장으로부터 포교사단을 위해 헌신한 공로에 대한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포교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40~70대를 대상으로 온라인에 ‘합장하는 사람들’ 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도법사로 108산사순례를 다녔다.
“약 3년 동안 한 달 한 번, 1회 세 군데 사찰 이상을 답사하며 108사찰순례를 다녔습니다. 모든 도반들 덕분에 잘 회향했습니다. 요즘은 반야불교산악회에서 지도법사로, 보명사 산악회에서 신행 지도로 매월 1회씩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이제는 그가 오랫동안 공부한 부처님의 가르침도 함께 나누게 되었다. 한국불교대학 천안 천불사 지부 상임교수로서 천불사에서 불교대학 강의를 이어갔다. 부학장의 직함을 달고 있는 보명사 불교대학에서는 올해 6년째 강의 중이다. 덕분에 은퇴 전에는 선생님이었지만 이제는 교수님으로 불린다. 더불어 신행과 수행도 열심이었다. 초하루나 지장재일 등 행사가 있을 때에는 빠짐없이 절에 간다고 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바삐 다녔지만, 은퇴 후가 더 활발한 불자의 삶이다.
| 불자는 100% 긍정!
정 포교사는 오늘 아침도 서재에 모셔놓은 부처님전에 청수와 향을 올리고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정근하며 절을 했다. 그는 “은퇴 후 나이가 들수록 불자로서 내 생활 패턴에 일관성이 생긴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예불하고, 절하고, 부처님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신행 활동과 수행은 저를 100% 긍정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불자는 100% 긍정이어야 합니다. 100% 긍정인 사람이 아는 사람이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정 포교사는 불자들이 은퇴를 위한 준비로 최소한 10년은 불교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수행과 신행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은퇴 이후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만났기에 제 삶은 항상 늘 새롭습니다. 불퇴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믿음이 확립되면 자기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외롭고, 괴롭고, 두렵고, 슬픈 마음에 끄달릴 이유가 전혀 없어요.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흔들릴 때가 있죠. 그런 것들은 잠시 인연으로 지나갈 뿐, 부처님은 항상 내 곁에서 나하고 함께한다는 걸 알면 어떠한 어려움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으로 시작한 불교였다. 이제는 그도 아버지가 출가를 결심했던 환갑이 지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정말로 자신의 인생을 멋있게 마무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길을 일찍 접하게 됐다. 노후를 잘 지낼 수 있도록 안내해준 안내자로써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불자로서 앞으로의 인생계획을 전했다.
“첫째는 죽음을 멋있게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고, 마지막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잘 죽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자식들에게는 ‘내가 죽고 나면 정광성 박사 말고, 일지 정광성 포교사로 남겨 달라, 수의도 포교사복으로 입혀서 보내 달라’고 유언장으로 남겼습니다. 둘째는 불자다운 불자, 포교사 불자가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려 합니다. 세 번째 희망이 있다면 자녀들에게 멋진 삶을 살다가 갔다고 이야기 들을 수 있도록 살고 싶습니다.”
그는 퇴직 후 명상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달 3월 처음 ‘참 나 찾기 수행프로그램, 토요마음치유 아카데미’를 열었다. 포교사들과 함께 모여 수행하는 모임으로 반딧불회라는 이름도 지었다. 반딧불이 알에서 성충이 되는 모든 순간까지 빛을 품는 것처럼, 항상 불성을 간직하고 거듭 탈피하면서 세상에 빛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경전과 강의계획서가 놓여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포교사는 부처님 말씀을 전하려는 원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 한 가장 훌륭한 일은 포교사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포교사입니다.” 그가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욱 빛날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