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看話禪)의 진수, 조주록(趙州錄)!
저작·역자 | 학산 대원 대종사 강설 | 정가 | 각 6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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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3-08-25 | 분야 | 종교(불교) |
책정보 |
판형 사륙배판(188×257mm)|두께 (상) 42mm・(하) 46mm|쪽수 (상) 696쪽・(하) 816쪽 ISBN (상) 979-11-92997-60-5 (94220)・(하) 979-11-92997-61-2 (94220) |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 학산 대원 대종사의 강설로 만나는
간화선(看話禪)의 진수, 조주록(趙州錄)!
“조주고불(趙州古佛)”, “천하조주(天下趙州)”로 명성 높은 조주 종심(趙州 從諗) 선사는 당대의 임제 선사가 할(喝)을 쓰고 덕산 선사가 봉(棒)을 쓴 것과 달리, 말[言句]로써 죽이고 살림[殺活]을 자재하여 많은 이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그래서 조주선(趙州禪)을 일명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한다.
조주 선사의 번뜩이면서 탁월한 선기(禪機)를 보여주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남전참묘(南泉斬猫)’,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끽다거(喫茶去)’,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등 수많은 고칙(古則)은 오늘날까지 간화선을 대표하는 공안(公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공안과 그 기연이 담긴 조주 선사의 어록이 바로 『조주진제선사어록』, 즉 『조주록』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 선사인 학산 대원(鶴山 大元) 대종사는 이 『조주록』의 525칙 공안을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장장 6년간 강설해 왔다. 이 책은 그 귀한 법문을 엮은 책으로, 조주 선사의 어록과 그에 대한 『선종송고연주』, 『선문염송』, 『염송설화』의 내용, 거기에 학산 대원 대종사의 착어와 송을 더했다.
이 고준한 선(禪)의 세계는 당장 알아듣지 못하여도 깨달음의 씨앗이 되고, 지혜를 탁마(琢磨)하는 거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학산 대원 대종사의 ‘조주록 강설’은 조주선의 진미(珍味)를 만끽함과 동시에, 아직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중생에게 깨달음을 향한 가장 탁월한 길이 되어 줄 것이다.
학산 대원 대종사(鶴山 大元 大宗師)
1942년 경북 상주 출생(음력 3월 13일)
1956년(만 14세) 상주 남장사로 출가(은사: 고암 스님, 계사: 동산 스님)
행자 시절 최초 오도(悟道)
1962년(만 20세) 구족계 수지
1966년 일대시교(경전) 이수(고봉, 성능, 호경, 혼해 스님 문하)
혼해 스님 문하에서 두 번째 오도
이후 21년간 제방선원에서 정진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회상)
1972년 고암 상언 대종사로부터 인가를 받음
‘뜰 앞의 잣나무’ 화두를 타파하고 세 번째 오도
1986년 고암 상언 대종사로부터 전법 부촉
석가여래 제70세 법손(용성 진종 –고암 상언 –학산 대원)
1986년 계룡산 옛 제석사터에 학림사(鶴林寺) 창건
1995년 오등선원 개원(조실로 추대)
2001년 오등시민선원 개원
2010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수석대표
2013년 해인총림 서당
고암문도회 회주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2014년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 법계 품서
2017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자문위원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
고암문도회 문장
2022년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법어집 : 『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 『진흙 속에서 달이 뜨네』
강설집 : 『무구자 도인 주해 반야심경』, 『대주선사어록 강설』, 『금강경오가해 강설』
[상권]
조주록 강설 서두에
발간사
해제
조주록 공안 목록
1칙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223칙 적면사(覿面事)
[하권]
조주록 강설 서두에
발간사
해제
조주록 공안 목록
224칙 진불(眞佛) ~ 525칙 연화(蓮花)
조왕이 바친 스님의 진찬에 붙임(附趙王與師作眞贊)
조주 화상의 죽음을 애도함(哭趙州和尙)
간화선(看話禪)의 진수, 조주록(趙州錄)에 담긴
고준한 선(禪)의 세계로의 초대!
우리나라 불자라면 꼭 한 번 들어봤을 법한 대표적인 공안(公案)이 있다. 과거 선사들의 언행록에서 뽑아 현재까지 전해지는 공안이 무려 1,700개. 그 수많은 화두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많은 수 ‘무자(無字) 화두’를 이야기할 것이다.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조주무자(趙州無字)’로 일컬어지는 이 화두는 중국 당나라 때 한 수행승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없다[無]”고 답한 데서 기인한다. 간화선(看話禪) 공부에 있어서 선(禪)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참구해 온 대표적인 공안인 이 무자 화두는 “조주고불(趙州古佛)”, “천하조주(天下趙州)”로 명성 높은 조주 종심(趙州 從諗, 778~897) 선사로부터 온 것이다.
2016년부터 장장 6년간의 강설을 엮은 조주선(趙州禪)의 진미(珍味)
조주 선사는 당대의 임제 선사가 할(喝)을 쓰고 덕산 선사가 봉(棒)을 쓴 것과 달리, 말[言句]로써 죽이고 살림[殺活]을 자재하여 많은 이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였다. 그래서 조주선(趙州禪)을 일명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한다.
무자 화두를 비롯, 조주 선사의 번뜩이면서 탁월한 선기(禪機)를 보여주는 ‘남전참묘(南泉斬猫)’,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끽다거(喫茶去)’,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등의 고칙(古則)으로 이루어진 『조주록』은 오늘날까지 간화선을 대표하는 공안으로 자리 잡고 있으니, 선사의 어록은 ‘간화선의 진수’이자 ‘화두선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선의 대중화・생활화에 심혈을 기울여 온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 선사, 학산 대원(鶴山大元) 대종사는 이토록 중요한 조사어록을 ‘이 시대 공부인에게 간화선을 비롯, 불교 수행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2016년부터 장장 6년간 283회의 법회를 통하여 강설해 왔다.
이 책은 당시의 법문을 하나로 엮은 책으로서 조주 선사 어록과 그에 대한 『선종송고연주』, 『선문염송』, 『염송설화』의 내용을 싣고, 학산 대원 대종사의 착어와 송을 더했다. 그리하여 사부대중에게 선에 대한 안목을 바로 정립하는 계기이자, 고준한 공안들로 이루어진 『조주록』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준다.
옛 조사가 가리키는 깨달음을 향한 탁월한 길
조주 선사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우리 삶이 그러하듯 수학 시험 문제와 같이 ‘계산’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답’은 없다. 대신 ‘길’이 있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아 보이지만 조주 선사와 옛 고승들이 그러했듯 조사가 가리킨 깨달음의 길을 우리가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학산 대원 스님은 첫 강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면 번거롭게 옛 조사의 어록을 강설해야 할 일이 없지만, 실상을 바로 보고 바로 알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수미산 같은 허물을 짊어지고 시작하노라.”
조사어록이 가리키는 가장 빠르고, 탁월한 깨달음의 길을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사의 알음알이에 젖어 사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가(佛家)에서 흔히 말하길, 불성(佛性)이란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명(無明)에 가려 그것을 발견치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다.
조주 스님 어록은 선의 종문에서 최상의 격외선 도리의 말씀이고, 또한 화두선도 조주 스님이 원조이다. 조주 스님이 “무(無)”라 한 거기서부터 간화선 화두가 시작됐다. 그래서 선의 골수요, 종문에서 최고의 고준한 진리의 말씀을 여러분이 6년 동안 들었다.
이 말을 듣고 조주 스님처럼 안 됐다 해서 실망할 건 없고, 다만 똑같은 인간인데 조주 스님은 그렇게 됐는데 나는 아직 안 됐으니, 나도 열심히 정진하면 조주 스님처럼 고준한 지혜의 안목을 열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더 분심과 환희심과 신심을 내라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알아듣기 어렵다는 이유로 선에 관심을 멀리하고 최상승의 길에서 퇴보해 버리는 이들도 없지 않다. 중생의 의식을 통해 아는 것은 중생의 습성만을 키우는 것이요, 중생의 의식을 벗어난 것이 반야지혜(般若智慧)이므로, 일체 분별과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오직 일념 참구를 통한 깨달음이 종문의 법칙임을 잊어선 안 된다.
고준한 선의 세계는 당장 알아듣지 못하여도 일문천오(一聞千悟)의 씨앗이 되고,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지혜를 탁마(琢磨)하는 거울이 된다 하였다. 학산 대원 스님의 조주록 강설은 이 시대에 향상일로이자 직절일로(直截一路)를 열어 보인 희유(希有)한 법문이니, 이로써 최상승 간화선이 널리 선양되고, 참학인(參學人)들은 참의심이 돈발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로써 사은삼유(四恩三有)에 보답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스님께서는 조주에 2년을 살았는데, 장차 세연(世緣)을 마치려 할 즈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화장하되 사리를 고를 것 없다. 종사의 제자는 세속과는 다르고, 더군다나 몸뚱이는 허깨비이니 사리가 어디서 생기겠느냐? 이런 일은 가당치 않다.」
스님께서는 제자를 시켜 불자(拂子)를 조왕에게 보내면서 말을 전하였다.
「이것은 노승이 일생 동안 쓰고도 다 쓰지 못한 것입니다.」 _ 상권 38쪽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이 도이다.」
「그래도 닦아나가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헤아리면 바로 어긋나버린다.」
「헤아리지 않으면 어떻게 이 도를 알겠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나니, 안다면 망각(妄覺)이요, 모른다면 무기(無記)라. 만약 의심할 것 없는 도를 진정으로 통달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이 텅 비고 확연히 트여서 어찌 억지로 시비를 할 수 있겠느냐? _ 상권 43쪽
지식은 양면성이 있다. 지식으로 새로운 것을 발명해서 이익을 주기도 하지만, 자기 이권과 편리 도모를 위해 이용하기도 한다.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상대방과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진다.
한 시대의 지식이나 패러다임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서 시간이 지나가면 또 새로운 지식과 패러다임이 나온다. 지식은 육근육진(六根六塵)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식이란 자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조작이고, 육근육진의 의식으로 사는 것은 틈새가 있다. 이걸로는 영원한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맛보기 어렵다. 평상심이 도라는 것은 그런 것을 벗어난 세계이다. _ 상권 55쪽
남전 스님 회상의 동당과 서당 양당이 고양이를 다투자 남전 스님께서 승당 안으로 들어와 고양이를 치켜들면서 말씀하셨다.
「이른다면 베지 않겠거니와, 만약 이르지 못한다면 베리라.」
대중이 말을 하였으나 모두 남전 스님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니, 즉시에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저녁이 되어 스님께서 밖에서 돌아와 인사드리러 가니 남전 스님께서는 앞의 이야기를 다 말해주고 물으셨다.
「그대라면 어떻게 고양이를 살리겠는고?」
스님께서 신발 한 짝을 머리 위에 이고 나가거늘, 남전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만약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_ 상권 92쪽
스님께서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양을 뛰어난 대인이라도 여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노승이 위산(潙山)에 갔을 때 한 스님이 위산 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위산 스님은 『나에게 의자를 가져오너라.』 하였다.
종사라면 모름지기 본분의 일로 사람을 제접해야 한다.」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스님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_ 상권 142쪽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여
만가(萬家)의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높은 누대를 비추는구나.
말없이 미소 짓고 눈썹으로 말을 전하니
천 개의 문에 부딪히니 만호(萬戶)가 활짝 열리는구나. _ 상권 197쪽
학인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는 어찌하여 없습니까?」
「개는 업식(業識)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니라.」 _ 상권 456쪽
보리니 열반이니 진여니 불성이니 하는 말은 다 몸에 붙은 의복이거니와 또한 번뇌라고도 부른다. 따지지만 않으면 번뇌도 없는데 실제 이치의 경지가 어디에 있단 것인가? _ 하권 24쪽
아직 세계가 있기 전에도 이 성품은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도 이 성품은 없어지지 않는다. 나를 한 번 봤다고 해서 재차 다른 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인공일 뿐이니, 이것을 다시 바깥에서 찾으면 어쩌겠는가? 이와 같은 때에 머리를 굴리거나 낯을 바꾸지 말라. 바로 잃어버린다. _ 하권 26쪽
부처님은 “사상(四相)을 취해서 살림을 사는 것은 범부요, 정한 바 없는 법[無有定法]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나니,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起心]”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조사는 어떠하냐?
海深龍臥穩 桐長鳳巢高
바다 밑에는 용이 누워 쉬고, 긴 오동나무에 봉황 둥지가 높다. _ 하권 27쪽
학인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만약 자네가 조사서래의를 말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
「본래의 밝은 진리는 무엇입니까?」
「너와 나의 눈이 서로 마주 보는 것 말고 다른 주인공이란 없느니라.」 _ 하권 149쪽
학인이 물었다.
「잣나무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어느 때 성불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지기까지 기다려라.」
「허공은 어느 때 땅에 떨어집니까?」
「잣나무가 성불할 때까지 기다려라.」 _ 하권 226쪽
잣나무에 불성이 있다 없다는 변견에서 찾지 말라.
산 위의 푸른 잣나무는 겁 바깥에 벗어나 있다.
어제는 부처님 머리가 보살 모습으로 변하더니
오늘은 보살이 부처님 몸으로 나타난다. _ 하권 229쪽
스님께서 두 명의 새로 온 납자에게 물었다.
「상좌들은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본 적이 없습니다.」
「차를 마셔라.」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있습니다.」
「차를 마셔라.」
원주(院主)가 물었다.
「화상께서는 와본 적이 없었던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차치하고라도, 와본 적이 있었던 사람에게도 어찌하여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입니까?」
스님께서 「원주야!」 하고 불렀다.
원주가 「예!」 하고 대답을 하거늘
「차를 마셔라.」 _ 하권 508쪽
누구에게나 차를 한 잔 마시라고 했다면 그걸 어떻게 알아듣느냐가 중요하다. 거기에서 의중을 알아들어야 부모 자식이 하나가 되고 부부가 뜻이 하나가 된다는 거다.
차 마시라고 하는 것을 ‘이 마음의 소식을 말한다.’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눈 감은 봉사라는 거다. 그게 아니라 반드시 차를 먹으라 하는 의중이 있다. 그걸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전부 다 ‘이 소식이지.’ 이러면 소통이 안 되고 못 쓰는 거다. 아기가 울면 ‘젖 달라고 우는구나.’ 하는 걸 알아들어야지, 아기가 우는데 주먹 들며 “이 소식이구나!” 이러면 되겠는가? 확연하게 바로 판단해서 바로 들을 줄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_ 하권 516쪽
오대산 참배 길에 한 노파가 있어, 스님과 문답을 하려 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오대산 가는 길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똑바로 가시오.」
그 스님이 떠나자마자 노파가 말하였다.
「또 저렇게 가는구나.」
조주 스님이 이를 듣고는 바로 가서 (노파에게) 물었다.
「오대산 가는 길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똑바로 가십시오.」
조주 스님이 떠나가자마자 노파가 말하였다.
「또 저렇게 가는구나.」
스님께서 즉시 돌아와서 대중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말씀하셨다.
「노파는 오늘 나에게 간파당했다.」 _ 하권 548~549쪽
노파는 말후의 한마디를 하지 못하여 조주에게 간파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조주는 바로 가고 돌아가는 것을 마음대로 행함이니, 스스로 구하고 스스로 뛰어남을 자유자재로 한다.
산승이 점검해보건대, 노파가 똑바로 가라는 것은 콧구멍이 하늘로 뚫린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할진댄,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리고서[一手擡 一手搦]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겠소?” 물어야 하리라. 그걸 묻지 못한다면 노파에게 바로 속임을 당한다.
노파는 조주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못했으니, 커피 한 잔이요, 조주는 돌아가서 노파를 간파했다고 했으니, 커피 두 잔이로다.
노파와 조주의 의지는 어떤 것인가?
눈은 가로요, 코는 세로이니라[眼橫鼻直]. _ 하권 6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