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래?”
“죽고 싶냐?”
“죽겠어!”
평소 우리가 심심찮게 하고 듣는 말.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듣는 사람 중에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겁니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대화에 등장하는 ‘죽음’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어떤 존재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 자체와도 큰 관련이 없지요. 그래서 부담 없이 마구(?) 사용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뉘앙스를 조금만 바꾸어도 상황이 108도 달라집니다. 앞에 한 단어만 추가하면 말이죠.
“(어떻게) 죽을래?”
“(어떻게) 죽고 싶냐?”
“(이렇게) 죽겠어!”
이때 ‘죽음’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본질적인 물음이 되어 버립니다. 생각할수록 무섭고 무겁고 암울한 느낌마저 들어서 길게 생각하거나 말을 잇고 싶은 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말은 평소에 잘 하지도 않을뿐더러 서로 주고받지도 않습니다. 나도 싫고 너도 싫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얘기를 꺼내 봤자 즐거울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살다 보면 한 번쯤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존재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한꺼번에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경험하거나, 특별한 계기로 죽음을 알아차리게 될 때가 그런 순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삶에 가까운 것인지 온몸으로 체감합니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사후 세계 설명서》는 이런 순간에 있는 사람, 혹은 죽음을 간접 경험해본 적 있는 사람이 보면 좋은 책입니다. 죽음을 외면하고 피하기보다 이를 직시하고 죽음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세우라고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 정신문명의 집대성인 세계 거대종교가 말하는 죽음과 사후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며, 삶의 방식만큼 죽음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꼭 죽음을 사유해야 할까요? 그건 바로 죽음이 삶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삶을 만든다니? 무슨 소리냐고요.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어서 하느님에게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지은 죄가 죽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매 순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를 믿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들 역시 제멋대로 살 수 없습니다. 지금 한 행동의 과보가 다음번 혹은 다음 생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화한 예이지만, 이렇듯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지향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어떤 죽음을 선택하고 어떻게 죽음을 정의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서 죽음을 대하는 방식도 제각각이겠지만, 어쨌든 저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정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삶 앞에 당당합니다. 언제 죽어도 후회 없다는 자세로 살아가기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충만하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어떻게 흘러갈까요?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는다거나 누구보다 오래 살 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분명 조금은 더 살 만해질 겁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을 외면하는 동안에는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죽음을 자각하는 것이 자신의 가능성을 똑바로 보는 삶의 방식이다.” 자신의 잠재력과 가치를 100% 발휘하고 살려면, 진정 바라는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죽음을 직시하라는 말입니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사후 세계 설명서》의 핵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잘 살고 싶다면 먼저 죽음을 사유하라! 죽기 전에 어떻게 죽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라! 그러면 세상이 더 살 만해질 거라는 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