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공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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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에 관하여
  • 초걈 트룽파 지음 / 이현주 옮김
  • 승인 2021.04.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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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많은 마음 공부와 영적 수행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인가?

 

마음 공부에 관하여
저작·역자

초걈 트룽파 지음

이현주 옮김

정가 17,000원
출간일 2021-03-31 분야 종교
책정보

판형 152×210mm|두께 20mm|296쪽|ISBN 978-89-7479-915-1 (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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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왜 수많은 마음 공부와 영적 수행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인가?

마음 공부를 시작하거나 오래 한 사람,

마음 공부를 마쳤다고 믿거나 혹은 의심해본 사람,

이들 모두가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마음 공부가 상품이 되는 시대이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사이비(가짜)는 있기 마련이어서, 가짜 영성 전문가와 수련 센터들이 도처에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에고(Ego)가 우리의 생각, 감정, 오감을 이용해 진정한 마음 공부의 길을 교묘하게 방해한다는 데 있다.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고 만족하거나, 스스로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거나, 안정적인 삶을 돕는 수단으로 마음 공부를 하는 등, 에고는 너무나 간사해서 스스로를 속이며 잘못된 마음 수행의 길로 이끈다. 이 책은 에고가 만드는 함정들을 하나하나 파헤치며 근본적인 마음 공부의 본질과 그 수행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 1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마다 ‘질문과 대답’으로 마음 공부를 하는 이들이 한 번은 가졌을 의심과 의문에 대한 답을 풀어준다.

저자소개 위로

지은이 초걈 트룽파(Chögyam Trungpa, 1940 ~1987)

티베트 스님, 존경받는 명상가, 영적 지도자, 예술가로 널리 알려진 초걈 트퉁파는 서양 세계에 불교를 전파한 중추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태어난 지 13개월 만에 환생한 스승[Tulku]으로 인정받은 그는 어려서부터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인 수련법을 두루 익혔으며 18세에 모든 학업을 마치고 불교 박사 학위(신학, 철학, 심리학)를 받았다. 이후 인도를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양 문화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바탕으로 서양인들에게 불교의 진리[法, Dharma]를 가르쳤다. 17년간 미국과 캐나다, 유럽을 오가며 수백 회가 넘는 강연과 세미나를 펼쳤으며 전 세계에 100개가 넘는 명상 센터를 건립했다. 그에게서 불교를 배운 학생들, 또 그가 만든 여러 단체들이 오늘날 서양 불교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전 세계 불교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 책은 197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에 있는 카르마 드종(Karma Dzong) 명상 센터에서 초걈 트룽파가 강의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강의를 통해,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에고가 만든 거짓 영성과 자기중심적 마음 공부에 빠져들게 되는지 파헤친다. 그리고 이른바 ‘영적 물질주의[Spiritual Materialism]’라 불리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참된 영성, 참된 마음 공부로 나아가는 길을 안내한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전보다 더한 물질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의 가르침이 날카롭고 뼈아프게 폐부를 찌른다. 그 아픔을 견뎌내고 진정으로 포기하는 용기와 열린 마음으로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면, 이 책이 ‘가짜’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되어줄 것이다.

옮긴이 이현주

관옥(觀玉)이라고도 부르며, ‘이 아무개’ 혹은 같은 뜻의 한자 ‘무무(无無)’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1944년 충주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목사이자 동화작가이자 번역가이며, 교회와 대학 등에서 말씀도 나눈다.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글들을 쓰고 있으며,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과 함께 《노자 이야기》를 펴냈다. 옮긴 책으로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집입니다》, 《너는 이미 기적이다》, 《틱낫한 기도의 힘》, 《틱낫한 명상》 등이 있다.

목차 위로

추천의 말

옮긴이의 말

들어가며

영적 물질주의, 에고가 만들어낸 가짜 깨달음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텅 빈 그릇이 되어라

나의 구루(Guru)는 ‘상황’이다

마음 공부를 시작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들

깨달음의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그것이 에고이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기대로 가득 찬 수행의 어리석음

완전히 열리지 못한 마음 공부는 욕망의 윤회를 되풀이한다

본래 별것 없음을 알면 세상의 가짜들이 다 보인다

에고가 만들어지는 다섯 단계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벽을 받아들여야 한다

에고를 뛰어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애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경지, 바라밀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하는 주문

제3의 자비, 무자비한 자비를 보라

에고를 변성시켜 마침내 열반과 하나 되다

초걈 트룽파에 대하여

상세소개 위로

1970년 미국에서 2021년 대한민국으로

반세기를 넘어 전해진 마음 공부의 고전

1970년, 지난 100년간의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미국 땅에 동양의 낯선 스님 한 명이 찾아왔다. 티베트에서 온 초걈 트룽파(Chögyam Trungpa)이다. 당시 미국 사회는 영적으로 매우 고양된 상태였다. 고성장에서 저성장 사회로 이행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동안의 물질주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적 기치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동양의 정신세계에서 더 깊은 삶의 의미와 전망을 찾고자 했다. 이런 시기에 미국에 정착한 초걈 트룽파는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지를 설파했다. 그는 깨달음마저 상품화하고 소비하려는 미국 사람들의 영적 물질주의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명상을 통해 곧장 영성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 책은 197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카르마 드종(Karma Dzong) 명상 센터에서 열린 초걈 트룽파의 강의를 묶은 것으로, 마음 공부와 영성에 관한 바른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살아 있는 고전이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더욱 심해진 물질주의 세태와 영성이 유용한 돈벌이 수단 중 하나가 된 이 시대에 전하는 날 선 가르침이다.

영성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에고가 만들어내는 ‘나’라는 신화이다

‘왜 수많은 마음 공부와 영적 수행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인가?’ 이 책의 부제처럼, 우리는 영성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왜 그토록 영성이란 것이 성취하기 어려운 것인지부터 물어야 한다. 왜일까? 초걈 트룽파는 ‘에고(Ego)’가 거기에 이르는 길을 교묘하게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행이란 마음의 깨어 있는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연습이다. 깨어 있는 상태가 곧 ‘깨달음’, ‘영성’이며, 그것은 본래 우리 안에 있다는 게 불교의 관점이다. 단지 에고가 만들어내는 미망에 가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면의 영성을 향한 우리의 눈길을 가리는 에고의 기술은 생각, 감정, 그리고 개념이다. 이 세 가지를 통해 에고는 독립적이고 고정된 ‘나’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생각하는 내가 ‘있고’, 감정을 느끼는 내가 ‘있고’, 세계를 인식하는 내가 ‘있다’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이렇게 에고는 나와 나 아닌 것을 분리하고, 나 아닌 것 가운데 좋고 나쁜 것을 가려내 취사선택하게 함으로써 이분법적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한다. 나와 동떨어진 깨달음과 영성, 세상이라는 관념 또한 이런 식으로 창조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에고는 진실을 보려는 우리의 마음 공부마저 도구로 삼아 우리를 거짓 영성에 빠져들게 한다. 저기 깨달음이 있고 네가 그것을 잡았다고,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너는 특별한 존재라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 에고가 꾸며내는 환상들을 물리치고 진짜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초걈 트룽파는 이 책에서 풍부한 일화와 예리한 비유로 그 답을 알려준다.

특별함이라는 환상,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

우리가 마음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 중에 ‘특별함’에 대한 추구가 있다. 마음 공부를 통해 남들과는 다른, 일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깨달음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깨달음이나 영성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평범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과 세상을 단번에 뒤집어버릴 초인적인 힘을 가진 깨달음을 상정하고 그것을 찾아 나선다. 특별한 깨달음이 생겨나면 뒤이어 그것을 얻기 위한 특별한 행위와 시도가 생겨난다. 세상과 떨어져 깊은 산중에 은거하거나, 엄격한 수행을 지속하거나, 특정한 종교적 도그마에 매달려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특별한 깨달음을 위해, 더 높은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한다.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하는 또 하나의 함정은 한번 찾아온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명상 수련 중에 깨달음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특별한 체험으로 여겨 그 순간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오, 놀라워라! 마침내 내가 해냈어”라며 자신의 경험을 값진 것으로 평가하고 영영 그것을 간직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움켜잡으려고 하는 순간, 깨달음은 현재에 살아 있는 생생한 체험이 아닌 과거의 기억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기기만의 게임이 시작된다. 더 이상 그것을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좋았던 시절, 추억으로 떠올리며 반복해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

참된 깨달음은 일상적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온전히 깨어 있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티베트 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에서 ‘평범한 지혜’, ‘참된 평범성’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마음 공부와 마음 수련이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과정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더 나은 것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일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지금 여기에 뿌리 내리지 않은 것으로 마음을 향할 때, 우리는 삶이 주는 영감(靈感)으로부터 멀어진다. 따라서 마음 공부는 언제나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깨달음과 마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자 최단 거리다.

무언가를 얻고야 말겠다는

에고의 기대를 비울 때 비로소 열리는 문

마음 공부 과정에서 스승의 존재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다. 수많은 결길 가운데 바른길을 찾아가는 안목을 길러주고, 수련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용기와 힘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스승을 우리는 구루(Guru)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뛰어난 스승을 만나 그로부터 자신이 가진 모든 문제의 답을 얻게 되리라 기대한다. 스승을 나보다 높은 존재로 여겨 그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고 그처럼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스승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스승의 복제품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참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수평적이다. 함께 영적인 길을 걷는 영적 친구인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숨김없이 자신을 활짝 열고 서로를 마주할 때,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통교(通交)가 이뤄지고 가르침의 전수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누군가 명성이 높다거나 많은 제자를 거느렸다고 해서 그를 구루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 그 사람과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스승을 향한 헛된 기대와 바람을 모조리 버리고,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로써 스승을 맞을 때 그가 가진 풍요로운 지혜가 우리의 본성과 연결되어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무작정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검증해 봐야 한다. 스승의 영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 삶에서 경험해야 한다. 그럴 때 가르침은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깨달음과 영감이 그러하듯, 가르침 역시 우리 바깥에 있는 낯선 것이 아니다. 스승으로부터 이식받는 비밀스러운 어떤 것이 아니다. 단순히 열린 자세로 서로의 본성에 직접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스승이란 활짝 열린 채 세상과 통교하는 자이기에 그런 스승과의 관계 맺음은 곧 곧 세상과 통교하는 일이 된다. 한 명의 독립적인 존재에서 전체 우주가 우리의 구루로 확장되는 것이다.

개방과 열림은 무언가를 얻고야 말겠다는 에고의 기대를 비워내고 스스로 텅 빈 그릇이 되는 것, 그 빈 공간에서 삶의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그려지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자기 자신과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아우르며 그 모든 것에서 진실을 보려는 시도이다.

깨달음의 시작,

내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잘라라!

이 책의 원제는 ‘Cutting Through The Spiritual Materialism’이다. ‘Cutting’의 의미는 내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잘라내고 끊어내라는 것이다. 그러한 완전한 열림과 완벽한 포기에서 깨달음과 영성의 길은 시작된다. 에고가 표현하는 수많은 욕망, 마음 공부를 통해 초월적인 무엇인가를 얻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전부 버려야만 갈 수 있다. 그런 삶은 어떤 것도 얽매지 않고 세계가 나를 관통해 흐르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불필요한 가치 평가와 판단 없이 세상과 물 흐르는 듯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자비와 사랑의 참 의미를 배우고, 그것을 삶에 녹여낼 수 있다.

진정한 자비와 사랑은 이편에 서서 저편과 맞서 싸우는 투쟁을 멈추는 일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애써 착한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공연히 엄숙해지지도 않으며, 모든 때를 현재로 보며 살아간다.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태의 게임들을 별것 아닌 시시한 말장난으로 본다. 에고의 요구와는 정반대인 이러한 태도가 에고 입장에서는 매우 폭력적이고 무자비해 보이지만, 우리가 마음 공부를 하는 이유가 에고의 끝없는 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

명상 수련의 목적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누군가 명상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때, 그것은 현재와 주변 상황에 온전하게 깨어 있다는 말이다. 어느 것 하나 놓치거나 무시하는 일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꽉 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옹글게 사는 사람에게 일상은 흥미진진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선입견 없이 오롯이 현재를 살아가기에 매 순간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펼쳐진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컬어 불교에서는 보살(菩薩)이라고 말한다. 보살은 용기 있게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작은 돌멩이 하나에서 대지의 든든함을 보고, 꽃 한 송이에서 우주의 에너지를 느낀다. 자신의 본성, 자연, 인생의 모든 상황과 막힘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써 내일을 위한 씨앗을 심지 않는다. 언제나 지금을 산다. 보살처럼,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영성으로 들어서는 열쇠이자 우리가 찾는 영성, 깨달음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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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자신의 생각, 감정, 개념과 다른 마음의 작용들을 면밀히 성찰한 부처님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수고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수고의 부재, 그 자체가 자유입니다. 에고 없는 상태, 그것이 곧 불성(佛性)의 성취입니다. 명상 수련을 통해 여태껏 에고의 욕망을 표현해오던 마음을 바꾸어 본래의 밝은 깨달음을 표현하도록 이끌어가는 과정, 이것을 참된 마음 공부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책속으로 위로

마음 수련을 제대로 하는 것은 아주 미묘한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그냥 순진하게 뛰어드는 어떤 게 아니에요. 일그러지고 뒤틀린 자기중심적 마음 공부로 빠지게 하는 곁길이 수도 없이 많거든요. 몇 가지 수련 방법을 사용해 결국은 자기중심성을 키웠으면서도 스스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게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_ 12쪽

우리는 영적인 가르침을 ‘나’의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어떤 철학으로 다룹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하나가 되어 가르침 자체가 되기를 실제로 원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에고를 버리라고 하면 우리는 에고를 버리는 시늉을 합니다. 근사한 행동을 하고 적당한 몸짓은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활 양식을 조금도 희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_ 27쪽

굴복과 열림의 몸짓은 굴복하는 대상과 연결되고 직접 통교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거칠고 조잡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우리의 본질에 대해 당황해하거나 난처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굴복하는 대상에게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굴복하는 행위에는 바깥의 힘에 대한 숭배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감을 받아 일하는 것, 그리하여 지식을 부어 담을 수 있는 텅 빈 그릇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_ 46쪽

나는 이곳 서양에서 구루라는 단어가 남용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그냥 ‘영적 친구’라고 부르는 게 더 낫겠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가르침이란 두 마음의 평등한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것은 고도로 진보된 존재와 비천하고 열등한 존재 사이의 주종 관계라기보다 평등한 상호 통교의 문제입니다. _ 57쪽

우리는 영성이란 매우 자극적이고 다채로운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이국적이고 색다른 종교 전통에서 우리 자신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보는 거지요. 또는 목소리의 톤을 바꾸고 식습관이나 다른 일반 행동거지를 바꾸는 것이 영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 양태를 습관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들은 우리의 천성이 되지 못합니다. _ 76쪽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경험을 했다면 그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우리는 그 일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아, 그 놀라운 체험을 다시 해볼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하면서 지금 경험하는 대신 그것을 기억하는 데 바쁘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기만의 게임입니다. _ 88쪽

“이 땅에 평화를!” 이 말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는 길은 평화니 전쟁이니 하는 관념을 모두 치워버리고 세상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에 똑같이, 그리고 철저히 당신 자신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중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빛도 있고 어둠도 있는데, 그 둘을 함께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럴 때 당신은 더 이상 어둠을 반대하며 빛을 옹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_ 127쪽

참된 명상 수련이 에고에서 벗어나는 길인 이상, 미래의 깨달은 마음 상태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요령입니다. 온전한 명상 수련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상황과 그 상황에 대처하는 수단들, 그리고 현재의 마음 상태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에고를 초월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모든 명상 수련이 현재 순간에 초점을 모읍니다. 그래서 그것이 매우 효과적인 생활 방식이 되는 거지요. _ 190쪽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것을 뭐라고 해석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 위에 어떤 영적 경험이나 철학적 관념 따위를 씌움으로써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어느 유명한 선사가 말했듯이 “밥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잠잘 때는 잠을 잡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꽉 차게 하세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곧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지 않는 곧은 사람, ‘성자[Rishi]’가 되는 것입니다. _ 228쪽

자비는 근본적인 ‘두려움 없음[Fearlessness]’을 속에 품고 있습니다. 망설임 없는 두려움 없음이지요. 이 두려움 없음은 끝없는 관용의 모습을 띤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힘을 남들에게 미침으로써 이루어지는 두려움 없음에 대조가 됩니다. 이 ‘관대한 두려움 없음’이야말로 자비의 본질로서 에고의 동물적 본성을 초월합니다. _ 250쪽

우리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며 안락한 생활 양식에서 퉁겨져 나와야만 합니다. 우리가 명상 수련을 하는 주요 목적은 인습적인 관점에서 보는 대로 정직한 사람 또는 착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안전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자기를 활짝 열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살아가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_ 253쪽

가면을 벗기고 꿰뚫어 보는 맑은 인식의 눈으로 손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보면, 돌의 단단함을 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속에 지니고 있는 의미까지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에서 대지의 단단함과 위엄이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말이에요. 실제로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에베레스트산을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놓여 있는 작은 돌멩이마다 태산의 단단함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_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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