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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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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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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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 도대체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죠?

 

깨달음이 뭐라고
저작·역자

고이데 요코 저

정현옥 역

정가 16,800원
출간일 2020-07-30 분야 종교>불교
책정보

ISBN 9788974798352(8974798352)

쪽수320쪽

크기135 * 200 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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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누구도 속 시원히 알려 주지 않는 ‘깨달음’에 관하여
일본 최고의 여섯 스님이 들려주는 거침없는 답!

깨달음은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이자, 모든 불자의 최대 관심사다. 그런데 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에 대해 ‘내 삶과 무관한 것’, ‘아무나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은 서른두 살 여성 불교 마니아가 일본 불교를 대표하는 여섯 스님을 찾아가 깨달음을 주제로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두루뭉술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깨달음이 어떻게 우리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저자소개 위로

고이데 요코

니가타 출신. 문필가. 재속 불교 팬. 편집프로덕션 및 미술계 전문도서관 근무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 편집자·문필가로서 불교계 텍스트를 중심으로 편집 및 집필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명상 프로그램 〈TANDEN 메소드〉를 고안해 명상과 대화로 생을 체감하는 방법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명상 및 대화 지도, 집필 활동, 강연 활동 등을 통해 모든 민족과 종교, 사상의 차이를 초월한 ‘미래 지향의 생명’에 관해서도 연구 중이다. 생명을 주제로 대화하는 모임 〈Temple〉(온라인 커뮤니티)을 운영하고 있다.

 

역자 : 정현옥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학교와 직장에 다니며 7년 동안 거주했다. 2018년 일본 학교 종교 교육 탐방 연수에 통역 자격으로 참가했으며, 2019년부터 오스트리아 관광청 홈페이지의 ‘버킷리스트’ 편을 번역하고 있다. 현재 번역에 주력하면서 틈틈이 통역에도 관심을 두는 한편, 초등학생 자녀와 동반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옮긴 책으로 《초예측》, 《이과식 독서법》, 《슈퍼 기억력 트레이닝》, 《결국 성공하는 힘》, 《나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기로 했다》 등이 있다.

목차 위로
들어가며

제1장 하나로 연결된 세상 즐기기_ 후지타 잇쇼(조동종 국제센터 소장)
제2장 꿈이었음을 깨달았다면 그 꿈을 즐겨라_ 요코타 난레이(임제종 엔카쿠지파 관장)
제3장 평온함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기_ 고이케 류노스케(전 쓰쿠요미지 주지)
제4장 매 순간 비우면서 살아가는 진흙부처 인생_ 호리사와 소몬(산젠인 문주)
제5장 죽음이 끝이 아닌 스토리로 살아가기_ 샤쿠 텟슈(뇨라이지 주지, 소아이대학교 교수)
제6장 꽁꽁 얼어붙은 나를 녹여 주는 부처의 목소리_ 오미네 아키라(전 센류지 주지)

나가며
상세소개 위로
서른두 살 싱글 여성의 돌직구!
윽박지름과 몽둥이 말고, 말로 설명해줘요!
대체 깨달음이 뭐예요?

어떤 사람이 큰스님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 무엇이 깨달음입니까?”그러자 큰스님은 대답 대신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할(喝)” 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큰스님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돌아온 것은 깨달음에 대한 답도 고함도 아닌, 세찬 몽둥이질(棒, 방)이었다.

이 이야기는 선(禪)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깨달음에 관한 아주 유명한 일화이다. 고함을 친 큰스님은 임제의현(臨濟義玄, ?-866) 스님이고, 냅다 매질을 퍼부은 스님은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 스님이다. 두 분 모두 당나라 때 선승으로 높은 경지의 깨달음에 이른 분이다.
깨달음을 묻는 말에 두 스님은 왜 이렇게 생뚱맞은 행동을 보여준 걸까? 깨달음이란 언어를 초월한 것이라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 혹은 깨달음을 찾는 이의 어리석음과 집착을 단번에 깨트리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들으면 잠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그래도 역시나 모르겠다. “그래서 깨달음이 뭐라고요?” 불교를 궁금해하고, 실제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 중에서 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다. 불교가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라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그 깨달음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칭 불교 마니아 고이데 요코 역시 ‘깨달음 앓이’를 겪었다. 서른두 살, 여성, 책 편집 일로 생계를 삼고, 싱글족으로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불교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 그녀는 불교 책을 뒤지고 명상을 하고 염불도 했다. 나름 온갖 방법을 동원하던 그녀는 결국 동경해 마지않는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돌직구로 물었다. “스님, 가르쳐 주세요. 도대체 깨달음이 뭐예요?” 평소 감히 가까이 가볼 수 없는 동경해 오던 스님들이기에 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은 매번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당돌한 그 질문에 대한 여섯 스님의 답은 유쾌하고 속시원하고 때로는 진지하고 허를 찔렀다. 윽박지름이나 몽둥이가 아니었다. 저자는 그 답을 들을 때마다 삶에 대한 넓은 진지한 시각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여섯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1:
깨달음? 지금 이 삶을 즐기라고!

저자 고이데 요코가 만난 스님은 모두 여섯 사람. 일본 불교계의 주류인 조동종과 임제종, 천태종에서 존경받는 스님들이다. 인도로 건너가 호랑이가 출몰하는 숲에서 홀로 명상 수행을 하거나, 20년 가까운 면벽 수행을 하는 등 한결같이 어려운 수행으로 나름의 도를 터득한 분들이다. 그 가운데는 《생각 버리기 연습》으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고이케 류노스케 스님도 있다. 깨달음에 대한 스님과의 대화록은 인터넷 안의 가상의 절 ‘히간지’에 연재되었는데, 연재 당시 인기를 끌었다.
깨달음에 대한 궁금함을 풀어줄 첫 타자인 후지타 잇쇼(조동종 국제센터 소장) 스님은 “깨달음이란,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러한 자각은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라 특별할 게 없으며, 자각했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설명을 덧붙인다. 자각, 곧 깨달음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깨달은 바를 실제 삶에 녹여내는 일이라는 것. 단발적인 체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삶으로 구현될 때에야 비로소 깨달음은 가치 있는 무엇이 된다는 얘기다. ‘깨달은 인간 이하의 인간’보다 차라리 ‘깨닫지 않은 인간다운 인간’이 낫다는 스님 말씀은 깨달음을 좇아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에게 진짜로 중요한 건 ‘특별한 깨달음’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바르게’ 살아가는 것임을 차분하게 일깨워준다.
임제종 엔카쿠지파 관장인 요코타 난레이 스님은 한술 더 떠서 “세상에 아무것도 깨달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며 존재한다. 눈을 돌려 주변을 바라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이러한 자연의 조화로움을 마음 깊이 인식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고이케 류노스케 스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한다. “깨달음이란 아무래도 좋고,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거침없이 말한다. 살다 보면 깨달음이라고 부를 만한 경험이 찾아오지만, 그 순간도 지나고 나면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 지나간 것을 붙잡고 있으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은 괴로움을 낳는다. 그러니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다 놓아버리고, 매 순간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 밖에도 일본의 다양한 불교 종파를 두루 섭렵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농산행(籠山行, 외부와 접촉을 끊고 12년 동안 칩거하며 좌선과 공부에 매진하는 일본 천태종의 수행법)까지 마친 호리사와 소몬(산젠인 문주) 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더라”고 고백하듯 말한다. 지금 모습 그대로가 부처라는 이치를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애먼 데서 깨달음을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끝으로 정토진종 소속 샤쿠 텟슈(뇨라이지 주지) 스님과 오미네 아키라(전 센류지 주지) 스님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심을 바탕으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이요, 구원이라고 말한다. 진실된 말에 따라 살면, 사는 동안 늘 번뇌와 괴로움이 따라다닐지라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에 관해 여섯 스님이 들려준 답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깨달음이란 일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삶에 밀접한 ‘무엇’이라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스님들은 깨달음을 좇는 사람들을 향해 공통의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특별한 깨달음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 것. 둘째, 깨달음을 좇기보다 눈 앞에 펼쳐진 지금의 삶을 충실히 살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하고 살아가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것(곳)에 이르게 될 거라는 게 스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여섯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2:
사는 데 꼭 깨달음이 필요할까?

‘깨달음’으로 시작된 스님들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삶’의 문제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찾기 위해 애쓰는 까닭이 무얼까?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지금보다 잘 살기 위해서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지금보다 덜 고통스럽고, 더 행복해질 거라고 믿기에 애써 깨달음을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기대에 스님들은 어떤 답을 들려주었을까? 과연 깨달음이 우리 삶을 어떻게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
깨달음이 무어냐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깨달음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스님들의 답 역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공통분모가 있다. ‘연결’, ‘현재’, ‘명상’. 이 세 가지가 핵심 키워드다.
먼저 깨달음은 우리가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때 연결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좁게는 내 몸과 마음의 연결이고, 넓게는 나와 내가 아닌 모든 생명과의 연결이다. 이러한 연결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뿌리가 분리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치 우리 몸과 마음이 따로 떨어져 있는 양 여긴다. 몸에 집중하느라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마음을 돌보느라 몸을 망가뜨리기 일쑤다. 또 자신을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처럼 생각하면서 세상사에 무관심해지거나, 남과 나 사이에 경계를 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것이 현대인이 겪는 외로움의 근원이며, 비교와 질투와 증오가 발생하는 시발점이라는 게 스님들 말씀이다.
또 하나, 깨달음은 ‘현재’를 살아가게 한다. 불교에서는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집착을 꼽는다.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대한 걱정, 기쁨을 간직하고 슬픔을 멀리하려는 욕심 등이다. 깨달음은 이 모든 것이 찰나에 불과하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 사실을 알면, 어떤 것에도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다. 아무리 애를 쓴들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집착 없이 온전히 현재에 머물 수 있으면,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좋고 싫다는 평가 없이 그저 흘러가도록 둘 수 있으면, 그 순간 우리 삶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내려놓음과 비움이라는 행복의 기술 역시 현재 머묾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정리하면, 연결성의 회복과 현재에 머물게 하는 힘. 이 두 가지가 깨달음이 우리 삶에 전하는 유의미한 가치이다. 덧붙여 스님들은 꾸준히 명상(수행)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명상이 일상에서 깨달음을 더 자주,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면서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지만, 그런 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쫓기듯 지나쳐버리기 십상이다. 일상에서 틈틈이 명상하고 불교 수행을 실천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작업이다. 자기 삶을 보살피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다.

여섯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 3:
“스님도 그랬어”, 좌충우돌 스님들의 인생담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여섯 스님의 생생한 인생담을 듣는 데 있다. 어떤 동기로 출가를 했고, 출가 후 삶은 어떠했는지, 불자로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등 보통의 삶과는 다른 ‘스님의 삶’의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덤으로 긴 시간 수행하며 살아온 스님들이 삶에서 체득한 알토란 같은 지혜도 얻을 수 있다.
후지타 스님과 요코타 스님은 젊은 날 전형적인 수행자상에 사로잡혀서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고 한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신경이 마비될 만큼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그것이 참다운 수행자의 자세라고 착각하며 살았다고 털어놓는다. 시간이 흘러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편협했는지 깨닫고 난 뒤 자연스레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었고, 세상과 수행을 대하는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고 한다. 밖을 향해 자신을 열어둘 수 있게 되었고, 좌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호리사와 스님은 일본 불교 천태종 역사에 ‘최초’의 인물로 우뚝 서게 된 사연을 소개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천태종에서 최고의 수행 과정으로 꼽히는 12년 농산행을 전후 최초로 완료한 사람이자, 처음으로 결혼한 스님이 자신이라고 밝힌다. 스님은 남들이 뭐라건 세간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품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본 내 다양한 불교 종파와 교류하고, 다양한 불교 전통을 공부하고, 그것도 모자라 인도까지 날아갔다. 평생 경계 없이, 매임 없이 불도(佛道)를 향해 달려온 스님 인생 스토리는 현대판 무애행(無?行)이었다.
이 밖에도 신심 깊은 할머니를 만나 불자로서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는 샤쿠 스님, 40대 초반 불현듯 찾아온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단숨에 날려버린 오미네 스님, 그리고 수행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알아차림 기법을 계발한 고이케 스님의 사연 등이 책 곳곳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여섯 스님이 들려주는 자기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뭔가 남다르고 특별해 보이는 스님들의 삶 역시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든지, 날마다 나아지는 삶을 위해서는 꾸준히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각자의 삶, 그 길 위에서 스스로 성실하게 묻고 답할 때 비로소 행복한 삶을 향한 ‘깨달음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깨달음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 잘 살았나요?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깨달음이란…… 그 뒤에 이어지는 단어는, 아마도 없다.

깨달음을 주제로 스님들과 대화한 후에도 여전히 깨달음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더는 그런 상황이 답답하고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맑고 청명한 기분마저 든다고. 그것은 스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대한 환상과 기대, 거기에 다가서고 말리라는 욕심을 훌훌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역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여섯 스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다 보면 ‘깨달음’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조금씩 바뀌어 갈 것이다.
어쩌면 깨달음에 관한 여섯 스님의 답이 기대했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라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와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깨달음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불교와 깨달음의 진정한 가치일지 모른다. 불교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깨달음은 일상적이다. 그리고 부처님처럼 산다는 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다.

인터뷰이 스님 소개

후지타 잇쇼(藤田一照)
조동종(曹洞宗) 국제센터 소장. 1954년 에히메현(愛媛?)에서 태어났다. 나다고등학교(灘高校)를 졸업 후 도쿄대학교 교육학부 교육심리학과를 거쳐 대학원에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생 시절에 좌선을 만나 깊이 빠져들었다. 28세에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선도장에 입산, 29세에 득도했다. 33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17년 반 동안 매사추세츠 샤르몽에 있는 밸리 선당(Valley Zendo)에서 좌선을 지도했다. 2005년 귀국해 현재 가나가와에 있는 지잔소(茅山?)를 중심으로 좌선 연구 및 지도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현대 좌선강의-지관타좌의 길(現代坐?講義-只管打坐への道)》, 《업데이트하는 불교(アップデ?トする??)》(공저) 등이 있다. 공식 사이트_ fujitaissho.info

요코타 난레이(?田南嶺)
임제종(臨濟宗) 엔카쿠지파(円?寺派) 관장. 1964년 와카야마현(和歌山?)에서 태어났다. 쓰쿠바대학교(筑波大?) 재학 중 출가해 졸업과 동시에 교토 겐닌지(建仁寺) 승당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1991년 엔카쿠지 승당에서 수행했으며, 1999년 같은 절에서 승당의 책임 지도자(師家)를 맡았다. 2010년 임제종 엔카쿠지파 관장으로 취임했다. 저서로 《기도의 연명십구관음경(祈りの延命十句?音?)》, 《참선 명승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の名僧に?ぶ生き方の知?)》 등이 있다.

고이케 류노스케(小池龍之介)
1978년 야마구치현(山口?) 출생. 도쿄대학교 교양학부를 졸업했으며, 가마쿠라(鎌倉)에 있는 쓰쿠요미지(月?寺) 주지를 지냈다. 2019년에 환속과 함께 절 이름을 ‘쓰쿠요미 명상 연구회’로 바꾸어 일반인을 위한 명상과 참선 지도 및 강좌를 이어오고 있다. 2003년 웹사이트 〈출가공간(iede.cc)〉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생각 버리기 연습》, 《화내지 않는 연습》, 《나를 지키는 연습》, 《부처의 말》 등 다수가 있다.

호리사와 소몬(堀澤祖門)
1929년 니가타현(新潟?) 출생. 산젠인(三千院) 제62대 문주. 교토대학교 경제학부 재학 중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이 있는 히에이잔(比叡山)에 오른 것을 계기로 불도를 더욱 깊이 공부하고자 학교를 중퇴했다. 천일회봉행(千日回峰行, 천 일 동안 히에이잔을 돌면서 정해진 장소에서 수행하는 것)을 완료한 천태종 스승 에나미소켄(叡南祖賢) 밑에서 계를 받았다. 전후 최초로 12년 정신수행을 달성한 후 인도의 니혼잔묘호지(日本山妙法寺, 법화종 계열의 종교법인으로 세계 각지에서 평화운동을 전개)와 임제종 다이토쿠지(大?寺)에서 학문하는 등 종파를 초월해 교류했으며, 재가 불자를 지도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천태종 스님을 양성하는 에이잔학교(叡山?院) 교장, 2002년에는 천태좌주가 되는 등용문 〈토즈설법〉의 설법사 소임을 지냈으며, 2013년 12월 산젠인 문주로 취임했다. 저서로 《우리는 모두 부처(君も?, 私も?)》 등이 있다.

샤쿠 텟슈(? 徹宗)
1961년 오사카(大阪) 출생. 류코쿠대학교(龍谷大?) 대학원 박사과정과 오사카부립대학교(大阪府立大?)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종교사상 전공. 정토진종(?土?宗) 혼간지파(本願寺派) 소속으로 뇨라이지(如?寺) 주지를 맡고 있으며, 오사카 소아이대학교(相愛大?)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NPO 법인 〈리라이프〉 대표이며, 고령 치매 환자를 위한 그룹홈 〈화목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죽음이 끝이 아닌 스토리에 관해 쓰고자 한다(死では終わらない物語について書こうと思う)》, 《현대인의 기도 : 저주와 축복(現代人の祈り叩芦`と祝い)》, 《70세! 인간과 사회의 늙어감에 관하여(70?! 人と社?の老いの作法)》 등 다수가 있다.

오미네 아키라(大峯 ?)
1929년 나라현(奈良?) 출생. 1959년 교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71-1972년 문부성재외연구원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유학했으며, 이후 오사카대학교 교수, 류코쿠대학교 교수, 정토진종교학연구소 소장 등을 거쳐 오사카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전 센류지(?立寺) 주지이자 하이쿠 작가로도 활동했다. 저서로 《신란의 코스몰로지(親鸞のコスモロジ?》, 《종교수업(宗?の授業)》, 《너 자신으로 돌아가라-지식과 믿음에 관한 대화(君自身に遠れ知と信を巡る?話)》, 《단 하나의 생명-잘 살기 위한 힌트(命ひとつ?よく生きるヒン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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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혹독한 수행을 거듭한 스님만 도달할 수 있는 특별한 경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완전히 딴 세상? 스님이 아니고서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이런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저도 오랜 기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인연을 만나다 보니 점점 의식하게 되더군요. ‘깨달음이란 절대로 먼 나라 얘기가 아니구나!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내 이야기였어!’ _ 6쪽

무언가 특별하거나 일상에서 벗어난 수행 같은 걸 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선(禪)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요. 불교는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가 중요하니까요. 마음이 이끄는 방향이랄까,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일상이건 무엇이건 불교에 접근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목적에 방식을 맞춘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 방식이 불교와 제대로 맞닿아 있다면 걷고 있는 길이 모두 불교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_ 15쪽

삶을 충실하게 살다 보면 분명히 무언가를 통찰하면서 성숙할 것이고 정화도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자각하고 말겠어! 정화해야지! 성숙하자!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바짝 힘주고 의지를 불태워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학습 지도 요령의 단원 목표,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웃음). 훨씬 거대한, ‘이번 생에 태어난 이상 제대로 살아 보고 싶다’라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소망. 그런 소망에 가치를 두고 살다 보면 언젠가 이루었노라고 자부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고 할까요. _ 39쪽

좌선을 하고 있으면 말이죠. 번개가 쳤다고 하면 ‘깨달음을 얻어야 해!’ 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가 있어요. 천둥소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이 있다 보니 너도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버린 거겠죠. 그런 착각이 옳지 않다는 말이에요. ‘번개를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의 고귀함이여.’ 깨닫지 않은 사람도 고귀하지 않은가. 이런 관점으로 보자는 거죠.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게 훨씬 낫다고 봐요. _ 75쪽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꿈이라는 걸 알았다고 꿈에서 벗어나려고 산에 틀어박힐 필요는 없습니다. 꿈을 즐기면 되는 거죠. 영화는 안심하고 즐길 수 있잖아요. 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화도 내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욕을 퍼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영화니까, 근본적으로는 안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좋은 꿈을 꾸도록, 좋은 영화를 보도록 이 세상을 살아가자는 얘기예요. _ 110쪽

‘고(苦)’라는 단어에는 괴로움이라는 뜻과 또 한 가지 ‘공허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서구 불교에서 말하는 ‘고’는 흔히 Unsatisfactory, 즉 불만족으로 해석되는데요. 이게 아주 딱 들어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많은 것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자신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따져 보면 모든 것은 굉장히 빠르게 흘러갑니다. 애초에 의지할 수 없는 것이죠. _ 134쪽

지나간 일에 ‘즐거웠다’, ‘좋았어’ 하고 감동할 때 뇌에서는 해마에 그 정보가 굉장히 강하게 저장되어 신경 회로가 패턴화합니다. (…) ‘이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겠지’, ‘이것을 본다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이것을 들으면 마음이 가벼워지겠지’ 하고 기대하지만, 실상은 그다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매번 가치가 떨어지니까 반복할수록 점점 기쁨의 질이 떨어져 버리죠. 이런 일을 막으려면 생성된 것을 끊임없이 깨끗하게 씻어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이나 식사의 즐거움도 모두 한 번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늘 리셋해야 하죠. _ 151쪽

인간이란 보통 정신(의식)과 몸이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최근에는 다들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서 모든 걸 생각해 버리잖아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의식하지 않아요. 동시에 두 개, 세 개 다른 일을 하는 게 능력이라고 착각하죠. 하지만 집중력을 방해하기만 합니다. 집중이란 정신(의식)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 동안에는 그 일과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이것이 명상이란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런 식으로 명상했다고 전해지고요. _ 170쪽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체험하고 비움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체험이 가능한 사람은 아주 일부예요. 하지만 부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공감 체험으로 충분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비움을 체험하건 못하건 모두 출렁이는 파도 하나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커다란 파도일지도 모르고 잔물결일지도 모릅니다. 깔끔한 파도일지도 모르고 탁한 파도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파도는 모두 진흙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전부 근본적으로는 물이라는 이치를 안다면 통달한 거예요. _ 181쪽

우리 인생도 스토리이고 신이나 내세, 행복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런 인간으로서 본질적인 문제도 일종의 스토리입니다. 불교는 모든 의미를 해체해 가는 끔찍한 체계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스토리라고 할 수 있어요. _ 210쪽

모든 과정을 체험한 다음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선택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죠. 하지만 인생이 그리 길지 않아요. 현실적으로 무리입니다. 어느 길이건 평생 걸려요. 하지만 성심성의껏 진지하게 걷다 보면, 그 체계가 불교로 묶여 있는 한 어느 길을 걷더라도 도착지는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자신의 연(?)을 찾는 길이 불자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_ 243쪽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을까? 무엇 때문에 태어났을까? 여기는 어디인가? 현재를 살아간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음이란 어떤 상태일까?……. 이 당연한 의구심을 한 번도 가져 보지 않았다면 인간으로서 어딘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인생 자체에 관한 질문이잖아요. 우연히 떠오른 의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인 거죠. 인생 자체가 처음부터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개인이 만들어 낸 질문이 아니라, 개인은 그것에 붙잡힐 뿐입니다. _ 277쪽

깨달음 위에 선 방황. 이것이 진정한 방황이랄까, 정토진종이 말하는 방황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방황은 단순하고 자기 생각에서 머물죠. 그러나 방황이 깨달음 위에 있으면 방황하더라도 그건 반드시 부처의 뜻입니다. 그러니 안심할 수 있습니다. _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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