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전남 장흥 보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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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전남 장흥 보림사
  • 이광이
  • 승인 2017.05.1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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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구들목에 앉아있는가 비탈에 서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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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구들목에 앉아있는가, 비탈에 서있는가

전남 장흥 보림사  

보림사 가는 길, 강이 나란히 흐른다. 산모퉁이를 따라 강이 휘면 길도 휜다. 물은 가운데로 흐르고, 살얼음이 낀 가장자리는 서 있다. 강가에는 얼음이 받아놓은 눈이 얇게 쌓여 있다. 겨울바람 따라 눈은 쓸려 다니고, 뿌옇게 일었다가 꺼지고, 사라진다. 강 건너 논이 푸르다. 논은 그루터기만 남은 황량한 잿빛이 아니고, 다시 뭔가를 키우는 초록이다. 그것이 꼭 보리는 아니다. 보리는 씨 뿌리고, 밟아주고, 타작해서,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기까지 그 눈물겨웠던 보리가 아니다. 푸른 것은 풀이다. 요즘은 소 먹이로 풀씨를 뿌린다. 풀은 제 알아서 크고, 봄에 베면 그만이다. 일손도 안 들고, 벌이는 보리농사나 큰 차이가 없다. 사람들이 보리를 안 먹고 고기를 찾으니, 논에 보리 대신 풀이 들어가는 것이다. “뽑을 때는 언제고, 심을 때는 언제냐!”는 풀의 항변을 들으며, 보림사로 들어간다.

이 땅에 선禪은 가지산 보림사에서 출발한다. 왜 선종은 서라벌에서 천리나 떨어진 저 서남쪽 외진 변방에서 시작됐을까? 당시 불교는 선이 싹 트기 이전, 교종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그것은 화엄의 교종과 잘 맞아 떨어졌다. 화엄은 조화이고, 세상은 두루두루 인연으로 얽힌 하나의 조화로운 빛이 아닌가? 상입상즉相入相卽, 어찌 손바닥과 손등을 둘이라 하겠는가?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는 이제 하나다. 화엄경이 가르치는 하나가 전부이고 전부는 하나라는 말, 하나의 티끌 속에 온 누리가 들어 있다는 말은 도토리 속에 참나무가 들어 있다는 말처럼, 저 광대무변한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 그 하나는 신라의 왕이고, 전부는 삼국의 백성이며, ‘왕즉불王卽佛’이라는 정치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교종은 그렇게 왕실과 귀족, 상류사회의 울타리가 되어 통일신라 3백 년 동안 단단한 통치 이념으로써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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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선은 역逆한 기운을 풍긴다. 모든 것은 마음이니 마음을 꿰뚫으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고, 글을 모르고 신분이 낮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은 가히 해방의 논리이고, ‘민즉불民卽佛’이라는 안티테제로서 휘발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에 유학하고 돌아온 도의 선사가 중국 남종선의 초조初祖 혜능의 법맥을 받아 이 땅에 첫 선을 보였을 때, 그 선은 불온한 것이었다. 막 깨어난 도의 선사의 선은 산그늘을 타고 가늘게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은 염거 화상을 거쳐 다시 보조 선사 체징에게 교외별전 되기에 이른다. 보조 선사가 설악산에서 선을 통한 뒤 봉우리와 봉우리를 타고 남하하여 정남진에 터를 잡으니, 그 곳이 보림사다. 선사가 보림사에서 선을 설했을 때,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선은 승가 뿐 아니라 민중에게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특히나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뜻과 딱 맞는 것이어서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뿌리 내리기 시작했고, 아홉 갈래로 퍼져 나가면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훗날 선은 교종(五敎)과 쌍벽을 이루는 선종(九山)이 되었고, 도의 선사는 조계종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보림사는 선종의 종찰宗刹이 되었다.

천년가람 보림사의 주지는 그러니까 선승이어야 맞다. 주지 일선日禪 스님은 “중2 때 출가해서 40년 선방을 돌아다녔는데 여태 중이다.”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 웃음소리는 깊어가는 겨울 밤, 바람소리와 바람이 흔드는 풍경소리와 누런 감잎차의 빛깔과 잘 어울렸다. 스님은 “신라의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노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 사상은 혁명 같은 것이었다.”면서 “그 진앙지는 보림사였고, 구산선문의 분포를 보면 백제 땅이었던 전라도 지역과 옛 고구려, 서라벌에서 먼 곳에 퍼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꼭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로부터 1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한 시대는 저물었다.3.png

1951년 가을, 전남지역 빨치산은 가지산에 집결하여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다. 장흥 유치는 산세가 험해 치열한 게릴라전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이듬해 봄 군경 토벌대가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왔고, 빨치산은 산으로 퇴각했다. 토벌대에게 보림사는 ‘공비들의 본거지’였다. 그 때 한 청년 소대장이 절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선종 대가람은 일주문과 사천왕문만을 남기고, 화마에 휩싸였다. 나무 크는 것은 1백 년이고, 베는 것은 10분이듯이, 1,300년을 내려온 고찰은 한나절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 난리 통에도 돌로 된 것들은 남았다.

실상사 탑과 더불어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아 통일신라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국보 44호), 토벌대가 사격연습의 표적으로 삼아 몸돌이 패어있는 보조 선사의 부도, 동부도와 서부도, 몇 점의 보물들. 그리고 기적처럼, 보림사의 주불 철조비로자나불(국보 117호)이 대적광전의 타오르는 불길을 견디며, 지권인을 취하고, 결가부좌를 틀고, 번뇌를 끊어 보리의 기쁨 안에 든 그 미소 그대로 당당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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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스님은 당시 토벌대 청년 소대장이 훗날 전남 도지사가 되었는데, 취임하자마자 보림사로 찾아와 머리 숙여 사죄하고, 스스로 불태운 당우들을 복원하는 큰 불사를 일으켜 지원했다고 들려주면서 “업이 그런 것이고 연이 그런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로자나불이 온전히 살아남은 것은 경이로운 일이고, 기적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값비싼 금이나 구리로 빚어졌다면, 불에 녹아내려 사라지고 말았을 거라. 불상이어서 견딘 것이 아니고, 무쇠라 견딘 거지요. 밥 짓는 가마솥이 불에 녹는 것 봤소?”라고 스님이 되묻는다.

전기로 연결된 물동이에서 칙칙 소리가 난다. 얼마나 차를 마셨는지 물이 떨어졌다. 삐걱거리고 열리는 방문 사이로 찬바람과 밤하늘의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에 겨울밤은 차곡차곡 깊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선은 보림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그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을까? “선이 구들목에 앉아 있으면 꾸벅꾸벅 졸아요. 늘 바람 부는 비탈에 서 있어야 선이지.” 하고 스님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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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2년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무등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 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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