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B급 스님들] 계(契)를 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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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B급 스님들] 계(契)를 하는 스님들
  • 한상길
  • 승인 2023.08.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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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계, 조선불교의 원동력

조선불교의 고난

조선은 새 왕조의 이념을 숭유억불로 내세웠다. 고려시대까지 불교계가 누려왔던 권력과 사회 지도 이념으로서의 가치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신왕조는 사찰이 지닌 전답과 노비를 압수하고, 아예 절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또한 승려의 자격을 공인하는 도첩제를 폐지하자 출가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억불의 조처가 2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16세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법령이 필요 없을 만큼 불교는 약화했다. 

19세기 초, 다산 정약용은 승가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양반 관리(존관尊官)들이 반나절을 즐기기 위해 절에 찾아오면 노승들은 3일 동안 쉬기를 잊고 하루는 휘장을 치고, 하루는 잔치에 참여하며 나머지 하루는 청소를 해야만 하였다.”

본인 역시 양반사회의 지배계층이었던 다산의 지적이 이 정도라면 불교의 현실은 얼마나 피폐했는지 알 만하다. 

흔히 이 시기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하고 정조를 성군이라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승가의 신분은 더욱 격하돼 천민 취급을 받았다. ‘사천승도(私賤僧徒)’, ‘사노비의승(私奴婢義僧)’, ‘무격승니(巫覡僧尼)’, ‘무녀비구니(巫女比丘尼)’ 등이 이러한 표현이다. 아예 스님을 사농공상의 4민(四民)에서 제외해 ‘이색(異色)’ 또는 ‘이단(異端)’이라고 천시하기도 했다. 

조선불교는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살아남았다. 그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고난의 시대에서도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고, 불법의 진리를 일궈내며 한민족의 문화 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사찰의 모습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억불의 압제하에서도 불상을 봉안하고, 불화를 조성했으며 전각을 세워 불법을 지켜냈다. 이 조선의 불교문화가 지금 우리 시대 불교의 모습이다. 

이러한 조선불교의 저력과 동력은 다양한 요소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사찰계의 결성과 활동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계(契)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일정 기간에 일정한 액수의 금전을 출자해 상호부조하거나,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임’이다. 불교의 계, 즉 사찰계는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사찰계는 ‘돈을 각출해 이자를 불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궁극의 목적을 불교적 가치 실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계는 정토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결성하거나, 가람의 신축·보수, 경전 간행, 또는 각종의 예배대상물을 조성하기 위해 조직했다. 즉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수행과 신앙심을 증진하거나 사찰 재산, 전각, 혹은 의식 용품 등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한 모든 조직체를 총칭한다. 그러므로 사찰계는 최종 목적이 불교신앙으로 귀결된다.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적 목적을 전제로 조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던 향도(香徒)나 고려시대의 보(寶), 결사(結社) 등도 넓은 의미에서 사찰계에 포함된다.

통도사 병오갑서문(1881)
기림사 염불계대성공비(1802)
옥천사 지장계서(1862)

 

사찰계의 시작

1564년(명종 19) 무렵, 사명당 유정(1544~1610)이 봉은사에서 갑회(甲會)를 결성했다. 

“바라건대 우리 벗들은 그동안 모아 놓은 것을 아끼지 말고서 천지 성현의 망극한 은혜를 갚도록 할 것이요,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천하의 태평을 이룰 것이요, 이와 함께 무량한 세월에 걸쳐서 우애하는 형제로서의 인연을 계속 맺을 것이다.” 
- 「갑회문(甲會文)」

갑회는 곧 갑계(甲契)이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 사명당은 22세 청년 시절, 봉은사에서 수행하던 도반들과 갑계를 결성했다. 수행을 진작하고 천하태평을 이루자고 결의했다. 

갑계는 ‘동갑계’라고도 하는데 같은 사찰에 거주하는 동갑의 스님들이 계금을 출연해 소정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직한 공동체다. 이보다 앞서 몇몇의 계 명칭이 확인되지만, 사찰계의 온전한 모습을 갖춘 경우는 사명당의 봉은사 갑계가 최초다. 즉 조선시대 사찰계의 실질적인 시작이 갑계에서 비롯됐다. 
이후 갑계는 사찰계 가운데 가장 많이 결성됐다. 현재까지 조사한 조선시대 사찰계 사례는 모두 25종 265건이다. 갑계가 75건으로 가장 많고, 불량계(48건), 만일계·염불계(39건), 등촉계(29건), 문도계(20건) 등의 순서다. 사찰계의 종류와 개설 횟수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계의 종류와 건수는 많지만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즉 계의 목적이 억불에 따른 신앙의 쇠락과 사찰경제의 궁핍을 극복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 유형도 ‘신앙 활동’과 ‘경제적 보사(補寺) 활동’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사찰계의 유형은 두 가지로 나뉘지만, 신앙과 보사라는 성격은 명확하게 분류하기가 어렵다. 계의 결성목적을 신앙과 수행의 진작에 두지만, 사찰 재정의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계 조직 내에서 경제 활동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17세기 말부터는 대부분의 사찰계가 신앙보다는 당시 사찰이 겪고 있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려는 보사 활동을 진행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자료가 대부분 보사 활동 사례만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렇다고 해서 계를 경제적 목적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앙과 수행이라는 구심점이 없이 보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굳이 계를 결성할 필요 없이 시주 행위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사찰계가 수행하는 경제적 역할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계의 성립과 활동, 그리고 조직과 규칙에 이르기까지 보사 활동이라는 목적이 일관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계의 결성은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경제적 계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경제 활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억불의 사회에서 사찰을 발전시키기 위한 신앙적 가치를 추구했다. 계의 성립을 통한 계금의 적립은 전각의 보수나 불공(佛供)의 확충 등의 보사 활동으로 전개돼 사찰을 운영하는 기본 틀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의 사찰은 수행과 포교, 신앙 활동 등을 펼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즉, 계는 식리(재물을 불려 이익을 늘림)와 생산 등의 경제 활동을 기반으로 수행과 법회, 그리고 의례를 집행하면서 억불의 시대를 헤쳐 나간 힘이었다.

범어사 병오갑보사유공단(1880)
범어사 어산계 보사유공비(1913)

 

사찰계로 절의 살림을 이끌다  

조선 초 많은 사찰이 문을 닫고 재산이 몰수되는 억불의 현실에서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었다. 전통적으로 시주에 의해 가능했던 사찰의 재정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당장 불전을 밝힐 등촉이 다 떨어진 현실에서 절을 지키는 일은 이름난 고승대덕이 아니라 무명의 수많은 스님 몫이었다. 1715년 영흥 안불사의 무오갑계 계원은 스님이 100여 명이었고, 1742년 문경 대승사의 불량계는 승속 213명, 1811년 포항 오어사 염불계는 승속 150명, 그리고 1862년 고성 옥천사의 지장계는 승속 533명이 참여했다.

“전각과 요사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간신히 명맥만이 남았다. 부역으로 인해 승려는 흩어지고 사세는 기울어 불전이 가득해야 할 겨울철인데도 창문에 종이가 없고, 향촉도 또 불공 올릴 쌀조차 없었다. 승도의 수치일 뿐만 아니라 보는 이들도 한탄하였다. 이에 1811년 산인 대엽(大曄)과 마을 사람 황처곤, 박지범 등 150여 인이 약간씩의 돈을 내어 염불계를 결성하였다.”
- 「염불계원유공비」(오어사 소장 목비)

이렇게 그저 이름만 전하는 이런 분들이 조선불교를 묵묵히 지켜냈다. 계의 활동은 금전과 물자를 시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시주가 아니라 집단의 노동력을 제공한 갑계도 있었고, 삼림을 육성하는 송계(松契)에서는 아예 노동 활동이 계의 근본 기능이었다. 또한 계의 다양한 기능은 교육 활동에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학계(學契), 범패를 전수하기 위한 어산계(魚山契) 등은 사찰계가 교학과 의례의 발전에도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억불의 사회에서 불교가 존속할 수 있었던 바탕에 사찰계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다. 구체적 예를 들어보자. 1870년에 활동한 팔공산 동화사의 갑계는 절의 모든 재원을 감당할 정도였다. 

“동화사는 큰절이라 운영하는 재원이 다른 절보다 배가 필요하다. 절의 승도가 몰락하여 간신히 이어 나가는데, 이것도 모든 도움을 전적으로 갑계에 의존하였다.”
- 「동화사 임자갑계서」

근대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찰은 범어사였다. 이곳에서도 “갑계가 있어 절이 존재한다(有甲有爾寺)”(「범어사임자갑유공기」, 1819)라고 했다. 범어사에는 조선 후기 이래 63건이 넘는 각종 계가 활동하면서 이른바 ‘부자 절(富刹)’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계의 활동은 단순히 재산을 증식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범어사가 근대에 선찰대본산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찰계의 재원을 바탕으로 근대 시기 20여 명의 스님을 일본에 유학 보냈고, 명정학교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운영하는 등 민족의 교육과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고성 옥천사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1910년대까지 17개 이상의 다양한 사찰계가 활동했던 옥천사는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증식했다. 이를 기반으로 불교전문강원을 운영했고, 서울은 물론 일본까지 유학생을 보내는 등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후 부산대학교의 설립에 크게 기증하는 등 옥천사의 사회·교육사업의 밑바탕에 이러한 사찰계가 있었다.

지금까지 조선불교 연구는 억불이라는 고정된 개념으로 설정하고, 그 구체적 면모를 헤아리는 데 진력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불교는 사상과 문화, 의식 등의 제반 분야에서 조선시대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불교를 부정적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면 결국 오늘날의 불교가 의지하는 전통과 역사성을 평가절하시키는 셈이다. 그러므로 조선불교의 발전적 측면을 탐구해 긍정적 인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선불교의 발전과 원동력이 곧 사찰계에 있었다.  

선암사 원통전 불량계 원방함(19세기 중엽)
당장 불전을 밝힐 등촉이 다 떨어진 현실에서 절을 지키는 일은 이름난 고승대덕이 아니라 무명의 수많은 스님 몫이었다. 1742년 문경 대승사의 불량계는 승속 213명, 1811년 포항 오어사 염불계는 승속 150명, 1862년 고성 옥천사의 지장계는 승속 533명이 참여했다. 이렇게 그저 이름만 전하는 이런 분들이 조선불교를 묵묵히 지켜냈다.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저서로 『조선후기 불교와 사찰계』, 『건봉사』, 『진관사』, 『조선불교통사』(역주), 『한국불교 의례문화 연구』 등이 있다. 

 

글·사진. 한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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