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 문인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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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 문인 김시습
  • 김풍기
  • 승인 2023.06.2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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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시대에 피워낸
김시습의 불교 옹호론
매월당 김시습 진영,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강릉에서[江陵]

鷄犬連鮫市    

桑麻接海門

腥風吹晩浦    

漁艇返花村    

닭과 개 우짖는 소리 바닷가 저자까지 들리고

뽕밭과 삼밭은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네.

비린내 머금은 바람 저녁 포구로 불어오는데

고깃배는 꽃마을로 돌아온다.

- 김시습, 「강릉(江陵)」, 『유관동록』(『매월당시집』 권10)

 

강릉을 떠돌며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다

수많은 천재가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우리는 천재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으면서 감탄하거나 그의 천재적 행적이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천재의 삶이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기보다는 비극적 아우라를 가지고 마무리되는 모습에서 역사의 엄혹함을 느낀다. 세상 사람들의 평균적인 생각과 시선을 넘어서 있으니 그의 말과 행동은 괴팍하다는 평을 받기 일쑤다.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기가 어려우니 조직 생활 역시 어렵다. 천재가 세상에 적절한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그런 점에서 매월당 김시습은 천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유학자이자 고승이자 도교 수행자였던 한 천재의 삶은 지금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김시습은 최초의 고전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작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강릉 사람으로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峯), 췌세옹(贅世翁),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 등이며, 스님으로 살아가면서 사용했던 불명(佛名)은 설잠(雪岑)이다. 강릉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했던 그는,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다음 전국을 떠돈다. 특히 강릉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을 여러 차례 돌아보면서 많은 시를 썼다.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쓴 시를 모아서 편찬한 책이 바로 『유관동록(遊關東錄)』, 『관동일록(關東日錄)』, 『명주일록(溟州日錄)』 등이다.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나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읽던 책을 불사른 뒤 출가해 방랑의 길로 나선다. 전국을 돌아다니던 그는 1481년 환속하고 결혼도 해서 속세에서의 삶을 이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승려의 신분으로 돌아가 떠돌다가 충청도 홍성 무량사에서 입적한다. 설잠(雪岑, 1435~1493)의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다. 『매월당집(梅月堂集)』에 많은 양의 시문을 남겼으며, 불교 저술로 『법화경별찬(法華經別贊)』, 『화엄석제(華嚴釋題)』, 『대화엄법계도주(大華嚴法界圖註)』,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등을 남겼다.

또한 세조 때 불경 언해 사업에도 일정 부분 관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세속 권력에 대한 매서운 비판

한양 남소문동(南小門洞)에 종실(宗室)이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시를 좋아했으므로 집에는 언제나 시인묵객은 물론 세상 밖에서 노니는 인사들로 북적이곤 했다. 당시 한시를 잘 짓기로 이름이 난 분 중에 조우(祖雨)라는 스님이 있었다. 종실의 집에 조우가 와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김시습이 뒤늦게 온 일이 있었다. 김시습은 그 자리에 조우가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우는 노사신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고 하던데, 이런 자를 어찌 사람으로 취급한단 말인가. 만약 이런 자리에 온다면 내가 반드시 그자를 가르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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