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상태바
[시가 말을 걸다] 고정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 동명 스님
  • 승인 2022.09.13 11: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_고정희(1948~1991)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정희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비 1992)

[감상]
어린 시절 무덤을 놀이터로 삼아본 사람들은 압니다, 무덤이 참으로 다사로운 곳이고, 한가한 곳이고,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무덤이 편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덤은 대체로 양지바른 곳, 바람이 잘 통하는 곳, 전망이 좋은 곳에 만들기 때문이고, 시인의 말대로 ‘여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한 사람의 발자취, 그 분주하고 신산했던 삶이 문득 멈추고, 원만한 보름달 같은 무덤으로 재탄생했을 때, 그리고 포근한 젖가슴 같은 무덤에 적당히 바람이 불고, 햇볕이 다사롭게 내려앉고 새들도 맑은소리로 노래하면, 무덤과 그 주위는 그야말로 부산했던 삶을 쉬게 해주는 여백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정희 시인은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는 멋진 시구를 우리 마음속에 걸어주었습니다.

시인은 어머니 산소에 갔습니다. 시인의 고향이 해남이니 그곳은 아마도 해남 바닷가의 산자락일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걸어두신 여백 덕분에 무덤 앞에서 시인은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을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바다로 흘려보냅니다. ‘방생의 시냇물’이라니? 시냇물은 많은 생명체의 목숨을 유지해주고 있으니 ‘방생의 시냇물’이겠습니다.

제법 긴 세월을 살다 여백을 남기고 가신 어머니에 비해, 아주 짧은 생애로 여백을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바람입니다. 바람이 휙 지나가고 난 자리에 휑하니 빈, 둥근 여백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여백은 삶의 뒤안길이고 일종의 부재이지만, 그 부재 뒤에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지요. 뭔가 떠올라도 시인은 쓸쓸합니다. 그리하여 그 쓸쓸함조차 여백임을 깨닫습니다. 아니 모든 것이 여백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시인은 감탄합니다.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시인은 아마도 자신의 동반자일 것으로 짐작되는 ‘너’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여백 아래 ‘너’는 먼바다를 보고 앉아 있게 되기를 시인은 소망해봅니다. 참으로 잔잔한 듯하면서 의외로 강렬한 사랑 고백입니다. 1연의 내용으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결론이지요.

저는 다 버리고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만 남기고 싶습니다.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