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김중식 ‘다시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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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김중식 ‘다시 해바라기’
  • 동명 스님
  • 승인 2022.07.05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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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출처 셔터스톡
출처 셔터스톡

다시 해바라기
_김중식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김중식 시집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사 2019)

[감상]
세상을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만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그런데 사막에서 해바라기 한 송이를 만났습니다. 과문한 저는 사막에서 해바라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김중식 산문집에 사진이 있을 것 같은데, 산문집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아 보지 못했습니다.

해바라기가 떼로 피어 있는 것도 아니고, 딱 한 송이라면 참으로 신비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감탄합니다.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성모(聖母)”처럼 거룩하고 성스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홀로 피어 있는 해바라기는 슬픕니다. 가족들과 이별해서 홀로 객지 생활을 하는 듯한 모습이니까요. 이에 여행자의 마음은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라고 가엾다는 눈빛으로 노래합니다.

그래도 세상을 비관하면서 여행을 떠난 이에게 사막의 해바라기는 희망입니다.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해바라기는 사막 끝까지 배웅합니다.

생각해보면, 살아 있는 것은 다 기적이다! ‘내’가 살아 있을 확률은 이 넓은 우주에서 몇 퍼센트입니까? 사실상 0%입니다. 그런데 여기 버젓이 살아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기적입니다.

해바라기는 기적입니다. 여행자가 기적적으로 사막에서 해바라기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내가 여기 기적적으로 살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동명 스님
중앙승가대 비구수행관장.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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