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이향지 ‘겨울이 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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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이향지 ‘겨울이 오는 것도~’
  • 동명 스님
  • 승인 2022.11.1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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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가을과 겨울의 길목, 서울 길상사에 떨어진 낙엽
가을과 겨울의 길목, 서울 길상사에 떨어진 낙엽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_이향지

나무 끝까지 올라갔던 초록이
다 내려온 후에야
길 건너편 창이 보인다

나뭇잎에 가려서 안 보이던 창 안에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한다

나무터널을 몇 십 분 걸어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나뭇잎을 따라서 모두 땅으로 내려왔나 보다

오늘 마지막 낙엽을 실은 작은 트럭이 떠났다

나도 내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 낸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향지 시집, ‘햇살 통조림’, 천년의시작 2014)

[감상]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겨울의 탄생은 이렇습니다.

대지와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게 반한 저승의 신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지하세계로 데려가 버립니다. 딸을 잃은 데메테르는 슬픔에 빠진 나머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눈물 바람으로 딸을 찾아 나섭니다. 대지의 여신이자 곡물의 여신이 손을 놓아버리니 땅은 메말라갔고, 풀과 곡물들은 시들었으며, 나무들은 이파리를 떨어뜨렸고, 여신의 눈물은 얼어붙어 세상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페르세포네의 아버지이기도 한 제우스가 중재에 나섰습니다.

제우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를 보내어 페르세포네가 그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 헤르메스는 이 사실을 하데스에게 귀띔했고,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건네며, “이 석류를 먹으면 너의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말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집에 가고 싶은 나머지 그 석류를 먹었기 때문에 하데스와 혼인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우스는 얼어붙은 대지를 살리기 위해 페르세포네를 지상으로 데려오되 1년 중 4개월은 저승에서 하데스와 지내게 했습니다.

페르세포네가 데메테르와 함께 보내는 8개월 동안은 곡물을 비롯한 온갖 식물들이 성장할 수 있지만, 나머지 4개월은 성장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4개월이 우리에게는 겨울이고, 낙엽이 지는 것을 필두로 데메테르의 슬픔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곧 데메테르 여신이니, 인간도 그녀의 슬픔에 동화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데메테르의 슬픔이 인간의 슬픔인 것은 아닙니다. 산천이 얼어붙었다 해도, 어쩌면 그러기 때문에 온 산천은 소독되어 맑고도 화창한 봄날을 맞이합니다. 찜질방에 가도 우리는 뜨거운 한증탕이나 미지근한 온탕에만 들어가지 않고, 오싹한 얼음 방에도 들어갑니다. 얼음 방의 냉기가 우리의 몸을 골고루 만져주면, 국수 면발이 얼음과 마찰하여 쫄깃쫄깃해지듯이 우리 몸도 팽팽한 탄력을 얻습니다. 거대한 얼음 방인 겨울이 찜질방의 얼음 방 이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겨울은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이파리를 떨군, 몹시 슬픈 듯한 나무들을 자세히 보십시오. 겨울나무의 가지 끝에는 새로운 눈이 보석같이 반짝이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꽃의 눈인 경우도 있고 이파리의 눈인 경우도 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데메테르의 눈물이 희망의 씨앗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씨앗은 차가운 겨울을 견딤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눈이 내리덮어도, 데메테르의 사랑으로 꽃의 눈과 이파리의 눈은 얼음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소년·소녀처럼 싱싱하고도 뜨겁습니다. 성장을 멈추었으나 더 큰 성장을 위한 집중과 명상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재미있는 각도에서 겨울이 오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겨울이 오면서 나뭇잎이 떨어지니, 길 건너편 창이 보이기 때문에 겨울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창 안에서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미소 띤 얼굴이 오래 켜지기도 하니, 그것을 보는 기쁨이 제법입니다.

시인에게는 마지막 낙엽을 실은 트럭이 떠나면 완벽하게 겨울이 온 것입니다. 시인도 창문의 나뭇잎을 걷어내면서 또 생각합니다.

“겨울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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