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이기철 ‘따뜻한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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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이기철 ‘따뜻한 밥’
  • 동명 스님
  • 승인 2022.08.2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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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백흥암 공양간
아침공양을 준비하는 백흥암 공양간

따뜻한 밥
_이기철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
세월에 용서 비는 일 쉽지 않음을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깨닫는다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이 어찌 어둠뿐이랴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들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들
생은 사는 게 아니라 아파하는 것이다
너는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예까지 왔느냐
나무들은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것이 내 믿음이요 신앙이다
나는 내 믿음이 틀렸더라도 끝내 수정하지 않으리라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알기 전에는
이런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리라
생을 업고 일을 업고 가기 위해선
이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종교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이기철 시집,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발우공양
발우공양

[감상]
지나온 날들을 우리는 보통 ‘발자취’라고 합니다. 발자취의 일차적인 뜻은 발로 밟고 지나갈 때 남는 흔적이지만, 지나온 과거의 역정(歷程)을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더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신발마다 전생이 묻어 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전생이 궁금하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내생이 궁금하냐?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실로 과거의 업으로 지금을 살고 있고, 지금의 업으로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뜻이지요.

한 그릇 더운 밥 앞에서 반성합니다. 과연 밥값은 하고 살고 있는지? 밥값을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지금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밥값을 하지 못한 결과로 미래에는, 내생에는 쫄쫄 굶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지만, 시인은 “어제는 모두 남루와 회한의 빛깔이다”라고 말합니다. “저무는 것들은 다 제 속에/ 눈물 한 방울씩 감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녁이 끌고 오는 것은 어둠만은 아니랍니다. 어둠의 글씨 속에 “내 용서받고 살아야 할 죄의 목록”이 있고, 어둠의 그림 속에 “내일 다시 걸어야 할 낯선 초행길”의 지도가 있습니다. 그 목록 속에서 내일 또 아파할 것이고, 그 지도를 향해 또 몇 켤레의 신발을 버리며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시인은 한 발짝도 걷지 않고 까불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나무를 칭찬합니다. 나무는 인간처럼 20세기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무를 칭찬하고 보니 시인은 자신이 나무를 칭찬할 자격이 있는지 반성합니다. 그는 나무의 거룩함을 찬양하려면, 적어도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쌀 안치는 손의 거룩함”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최소한의 밥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밥의 향기가 주는 구원의 메시지’라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종교’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성합니다.
참회합니다.
오늘, 최소한의 밥값이라도 했는지?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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