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曉峰의 정혜결사, 한국불교 전통을 잇다
상태바
효봉曉峰의 정혜결사, 한국불교 전통을 잇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6.10.05 13: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왜 효봉의 정혜결사인가?
한국불교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은 부처님 법답게 살기를 약속한 수행자들의 실천이다. 오래전부터 실행된 결사는 불맥佛脈이 사라져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법正法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런 까닭에 결사운동은 개혁改革의 상징이다. 그런 결사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시대 보조지눌(1158~1210)의 정혜결사와 근대 경허성우(1849~ 1912)의 정혜결사를 들 수 있다. 모두 교단이 혼미할 때 일어난 실천 수행 운동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자정 노력으로 상징된다. 특히 근대 이후 진행된 경허의 정혜결사는 그의 제자 만공(1871~1946)과 한암(1876~1951)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런 실천은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이러한 결사정신이 현대에 계승된 것이 1946년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행해진 효봉(1888~1966)의 정혜결사이다. 이 무렵 한국사회는 8・15 광복 후 정치적으로 급변하는 시대였으며, 불교계도 그와 못지않은 격변을 겪고 있었다. 1876년 개항 이후 침투해 온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해야 하며, 미 군정이 의도하는 기독교 우선 정책에 맞서 불교의 저변확대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시작된 효봉의 결사운동은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개혁적 의지를 천명하였다. 많은 수행자들이 동참하여 승풍 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효봉의 정혜결사는 개인적인 결사운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광복 후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난 한국불교 교단은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그의 수행정신과 지도력이 필요했다. 그런 요구에 따라 정혜결사는 해인사로 옮겨졌고, 한국불교 전체를 위한 수행도량인 모범총림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는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지속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정화운동이 끝나고 통합종단이 세워진 1960년대 한국불교의 승풍 정립과 송광사의 총림 건립 그리고 수선사修禪社를 복원하여 승보사찰의 전통을 회복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1946년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행해진 효봉의 정혜결사의 모습과 그 영향을 살펴보는 일은 광복 후 불교계의 동향을 이해하는 일이며, 한국 현대불교의 수행가풍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 현대불교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           경허, 만공과 한암 그리고 효봉
효봉은 한국 근・현대불교에 큰 족적을 남긴 수행자이다. 38세가 되던 1925년 음력 7월 8일 외금강산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石頭를 은사로 출가하여 법명을 원명元明, 법호를 운봉雲峰이라 하였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까닭에 그는 무문관 수행과 장좌불와 그리고 오후불식 등 철저한 수행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곳을 다니며 보임의 길을 걷던 효봉은 많은 선지식을 친견하였다. 그 가운데 경허의 정혜결사를 계승한 만공과 한암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결사 정신을 계승할 수 있었다.

효봉이 한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5년이다. 그해 겨울 안거를 오대산 상원사 한암의 회하會下에서 보냈다. 한암은 그곳에서 1921년 건봉사에서 실천한 정혜결사와 1929년 불경사佛影寺 조실로 주석하면서 그곳 선원에 수선사修禪社를 세워 실천한 정혜결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효봉을 만난 한암은 그의 법기를 알아보고 1936년 10월 11일 포운泡雲이라는 법호와 함께 인가를 주었다.

한암과 헤어진 효봉은 1936년 덕숭산 정혜사에서 만공과 함께 동안거를 보냈다. 금강산 마하연선원에서 덕숭산으로 옮긴 만공은 이곳에서 선회禪會를 개최하여 선풍을 진작시키며 경허의 정혜결사 정신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곳 정혜사 선회에서 만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겨울 안거를 보낸 효봉은 해제 때 선옹船翁이란 법호와 함께 인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만공, 한암과 같은 선지식과 함께 수행을 마친 효봉은 1937년 50세가 되던 해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결사 도량인 조계산 송광사에 가게 되었다. 생애 처음 간 곳이었지만 전생에 살았던 곳처럼 낯설지 않았고, 옛 고향에 온 것처럼 심신이 안온하여 운수행각을 멈추게 되었다. 이후 송광사 삼일암에 10년간 주석하면서 많은 납자들을 제접提接하는 한편 보조 국사의 가풍과 정혜쌍수의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서원을 세웠다. 그런 결심이 서자 지금까지 불렀던 운봉원명雲峰元明이란 법호와 법명을 효봉학눌曉峰學訥로 바꾸면서 지눌을 배우는 납자임을 드러내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