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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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왔습니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7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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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외로워지면 무작정 남행을 하였다. 술에 취해서도 남행하였고, 계절에 취해서도 남행하였고, 사람에 취해서도 남행하였고, 슬픔과 이별에 취해서도 남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내 남행의 끝에는 늘 절이 있었다. 신산한 몸을 눕혔다가 일어나면 객사 앞 절 마당 한쪽에 홍매화가 짙붉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거나 배롱나무꽃이 피어 있거나 단풍이 마지막 붉은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때로는 눈까지 내려서 그 순결한 눈밭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새기게 하였다. 나는 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시절의 괴로움과 떠도는 마음들을 내려놓고 존재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던가.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나는 날마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에 절여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병원에서도 이미 심각한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우울증 등의 진단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날마다 기진맥진, 낮은 포복 상태로 일상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접대니 뭐니 핑계를 앞세워 술집을 전전했다.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도무지 막막하고 고독한 일상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절에 가자! 그날도 무슨 핑계에선가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나는 내 스스로에게 선언하듯 외쳤다. 절에 가자. 나는 그 자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전라도로 향했다. 마침 머릿속에 후배가 입산해서 수행하고 있는 절이 떠올랐던 탓에 연락도 없이 무작정 택시를 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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