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스님이시여!
보우 스님의 넋이여!
이제 다시 회암사터에 서니 스님께서 몸을 버리고 불법의 수레바
퀴를 돌리려했던 그 결연한 의지가 한껏 푸르러진 녹음처럼 되살아
나는 듯합니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건대 공부에 나아감은 적고 이웃에 법을 전함
도 미약하니 어찌 보현 보살의 원력으로 조선시대의 메마른 땅에 부
처님의 감로법을 뿌리시려는 스님의 굽힘 없는 의지와 한량없는 신
심을 뒤쫒을 수 있겠습니까?
보우 스님이시여, 스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서있는 바로 이
곳, 천보산 회암사는 고려불교사의 말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자취를 남기고 있는 터전이 아닙니까.
인도의 고승 지공 스님이 중국의 원나라를 거쳐 우리 금수강산에
들어와 각지를 순례하다가 1324년 (충숙왕 15년) 에 터를 잡아 세
운 절이 바로 이 회암사입니다. 지공 스님은 원나라로 돌아가서도
고려 여인이 세운 법천사에 머물다가 1363년에 입적하셨고 그 사리
를 지공 스님의 인연처인 이 회암사에 모셔와서 부도탑을 세운 때가
공민왕 21년인 1372년이었습니다. 지공 스님과 이 땅과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졌으니 출가납자들과의 인연,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보우 스님이시여!
나옹 스님 (320~1376년) 이 21세 때에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출가한 후 전국의 수행처를 편력하다가 이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은
해가 1344년이었습니다. 1347년에는 원나라로 건너가 법천사에서
지공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4년을 보낸 것도 모두 회암사와 맺은
인연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나옹 스님은 원나라 순제의 명으로 광제선사(廣濟禪
寺) 의 주지가 되어 개당법회를 열기도 하였으나 다시
주지직을 내어놓고 지공 스님을 찾아뵌 후 공민왕7년
인 1358년에 귀국하셨습니다.
공민왕의 왕사로 송광사에 머무는 것도 잠시, 회암사
의 주지가 되어 3년에 걸쳐 절을 중수하고 1376년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이 해에
왕의 명령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시던 도중 신륵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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