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공 고달의 넋이 스민 땅 여주 고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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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 고달의 넋이 스민 땅 여주 고달사지
  • 관리자
  • 승인 2008.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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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1

행장을 꾸려 길에 나선다.

코끝에 닫는 바람 속에는 이미 봄내음이 묻어나건만 꽃샘추위로 날은 아직 쌀쌀하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도 10여년이 넘었으리라. 그 무렵에도 홀로 이 산천의 골골마다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문화 유적을 찾아 꽤나 부지런히 쏘다녔었다. 그 때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국보 몇 호, 보물 몇 호라는 명찰을 하나씩 달고 역사의 그늘 속에서 무료히 시간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고달사지 신륵사를 거쳐 동북방향의 북내면 쪽으로 차를 달린다. 그때에도 유적답사의 처음 방문지로 정한 곳이 바로 이곳,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지였다. 비포장도로에 드문드문 있는 시외버스를 이용해야만 했으므로 서울에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곳으로는 고달사지가 제격이기도 하였다.

또한 국보1호인 남대문과 국보2호인 파고다공원내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쉽게 볼 수 있었고 국보 3호인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는 군인들이 지키는 출입금지구역이라서 올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보 4호인 고달사지를 첫 방문지로 삼게 된 이유가 되었으리라.

그 후로 몇 번을 더 이 절터를 답사하는 중에 참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버스길도 모두 아스팔트로 바뀌고 걸어 들어갔든 소롯길도 시멘트 도로로 변모하여 작은 배낭을 걸머지고 훌훌 걸어가든 낭만은 사라지고 말았다. 대규모 농장이 들어서서 조용하고 아늑하던 골짜기가 시끄러워 지기도하였고 옛 절터에는 어느 이름 모를 스님의 원력으로 조그만 간이 법당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분주하지는 않으며 조용히 거닐며 우리의 불교유적을 돌아보고 거기에 서려있는 조상들의 슬기와 원력과 신심을 읽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부유해지고 커지고 높아지는 이 시대에 아직도 이처럼 조용한 절터가 서울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요 기쁨이다.

불교문화재는 빠른 걸음으로 얼핏 보고나서 사진이나 기념으로 찍어두는 관광물이 아니다. 신심으로 빚어진 유산이므로 그 유물을 만들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가졌던 손길과 심정을 느끼고 이해해야만,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제대로 된 답사요, 진실 된 불자라고 할 것이다.

그럼 이제 고달사지에는 어떠한 유물들이 이나, 그 안쪽으로 들어 가보자. 동네 한가운데 있는 큰 느티나무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민가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가면 고달사지 석불좌(高達寺址 石佛座)가 길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벌써 보인다. 보물 8호인 이 불좌는 돌로 만든 부처님의 좌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위에 모셔졌을 부처님의 자취가 없다. 이 좌대에 걸맞는 부처님과 이 부처님이 모셔졌을 법당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고달사지의 전체 규모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넉넉히 그려볼 수 있다.

이 좌대에는 연꽃들이 간결하지만 대담하게 조각되어서 예경하려는 불자들의 눈길이 부처님에게로만 향하게 하려는 깊은 배려가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기록에 의하면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처음 세워져서 고려시대에는 사방 30리가 절의 소유였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고달사라는 절 이름에 대하여는 석공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함흥의 석공인 고달(高達)은 이곳의 절을 중건하는 책임을 지고 오직 돌을 쪼고 다듬는 일에만 몰두하였다가 가족들을 모두 잃고 나중에는 이 절의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절이 날로 번창해짐에 따라 절의 이름을 고달사라 불렀다고 한다.

돌 좌대에서 법당쪽 길을 따라 20m쯤 올라가면 오른쪽에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元宗大師慧眞塔碑 龜趺) 및 이수(螭首)가 남쪽을 향하고 앉아 있다. 원종대사의 발자취를 새겨 넣었을 비신(碑身)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흔적이 없고 이 비신의 좌대인 돌 거북(귀부라고 부른다.)만 얼굴을 약간 움츠린 채로 스치어 지나가는 바람의 냄새를 맡는 듯 코를 벌름 거리는 모습이다.

이수는 비신의 위에 얹혀진 뚜껑돌이니 주로 구름과 용을 조각하는데 여기의 이수도 몇 마리의 용이 힘차게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유물도 그 규모와 조각수법이 웅장하고 대범해서 이만한 솜씨를 나타내려면 손끝의 기술만으로 될 것이 아니요, 깊은 신심이 그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결론에 막힘이 없다.

양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 문관석 사이를 지나서 왼쪽으로 난 밭두렁 길을 거쳐 야트막한 언덕길을 5분쯤 올라가면 부도탑의 웅장한 모습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어른거린다. 높이 3.4m의 이 부도탑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승의 유골이아 사리를 모셨을 터인데 아랫부분의 거북이 머리를 튀어 나오게 조각하려고 들였던 공은 얼마였겠으며 네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 노니는 모습을 새긴 시간은 또한 얼마였겠는가?

8각형의 부도탑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탑이면서도 안정감이나 조각 수법이 뛰어나 마땅히 국보 4호라는 영예를 얻었으리라.

이 부도탑에서 다시 소나무 오솔길을 북동쪽으로 걸어가면 또 하나의 부도탑이 나온다. 이 탑이 바로 원종대사의 부도탑이니 아래쪽에서 보았던 귀부와 이수의 주인공이다. 원종대사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사의 깨어진 비석이 근정전 뜨락에 남아 있어서 신라 경문왕 9년(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 90세로 입적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법천사지 목아박물관을 잠시 들린 후 원주군 부론면에 있는 법천사지로 들어간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서 이 절이 번성하였을 때에는 강을 이용해서 각 지방의 물품을 나르는 선창이 있었고 또한 이를 관리하기 위한 병사들도 있어서 그 중추적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법천사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이곳에는 국보 101호인 지광국사 현묘탑(智光國師 玄妙塔)이 있는데 일제시대때 어느 일본인이 자기 집 뜰에 옮겨 놓았든 것을 다시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 부도탑은 웅건한 맛은 없으나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그 섬세함을 눈여겨 볼만하다.

현재 이곳에는 지광국사 현묘탑비(玄妙塔碑)가 남아있는데 현묘탑과 마찬가지로 웅장하고 안정된 맛은 없으나 비신과 이수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은 쉽게 찾을 수 없는 명품이라 할 만 하다.

돌아오는 길에 거돈사지(居頓寺址)를 잠간 들르니 해는 이미 서산마루를 내려가며 마지막 붉은 기운을 구름 속에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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