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떤 것을 배우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른 기반을 쌓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얼마나 높이 도달할 수 있을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상을 배우든, 요리를 배우든, 대학원에 진학을 하든, 어떤 선생님에게서 배우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좋은 선생님이라면 여러분들이 힘들어 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여러분이 미래에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도록 단단한 기반을 준비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상 수행에서의 기반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어떤 자세가 맞는지, 어떤 진언(다라니)가 가장 효과적인지, 화두가 좋은지, 위파사나가 더 나은지 그런 것들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아마도 저도 명상을 처음 배울 때 이런 질문을 들었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겁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명상 등 모든 마음 수행의 가장 중요한 기반은 계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명상을 배운다면, 또는 참선 수행을 시작한다면, 계율이 무엇인지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이 계율을 지켜야만, 마음을 고요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율을 받아서 지키기 시작하면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언제나 평온해지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각이 많은 이유는 계율에 엄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격인가요?
불교에서 모든 계율의 기반은 재가인이 받는 오계입니다. 사실 오계는 모든 도덕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위앙종의 마지막으로 알려졌던 조사 스님인 선화 상인은 오계를 위앙종 종지의 육대원칙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불교에서 계율을 받아서 지키지 않는다면, 오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계율에 대해서 설명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선의 기반이 부족한 것입니다.
첫째 원칙은 싸우지 않는 것(부쟁)입니다. 세상은 나날이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모두들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성을 위해, 자기 이익을 위해, 권위를 위해, 지위를 위해 싸웁니다. 사람들은 늘 싸웁니다. 우리는 늘 밖에서 원하는 걸 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는 삶에 뭔가 결여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싶어합니다. 마음엔 평화란 없이 항상 요동칩니다. 우리는 항상 사적 이득을 위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투쟁합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밤낮으로 작당합니다.
여러분이 일하러 나갑니다. 승진을 원한다면 승진을 위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집에 갈때면 여러분은 그 투쟁하는 마음을 갖고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그걸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린 그걸 인생으로 받아들입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화상인은 여러분이 명상을 하면, 여러분이 첫 번째를 멈춰야하는 것은 싸우려는 이 생각을 멈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싸우려는 생각을 즐기지 마십시오.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원칙은 불교의 불살생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쟁은 살생의 더 미묘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살생의 마음의 기반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누군갈 죽입니다. 바로 그게 싸움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죽입니다. 바로 그것이 싸움의 정신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길을 갑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계속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 식대로 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죽입니다. 바로 그것이 싸움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명상하려면 먼저 우선 이 싸우려는 생각부터 멈춰야만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싸우지 않고 앞서
현안(賢安, XianAn) 스님
2012년부터 영화 선사(永化 禪師)를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2015년부터 미국에서 명상을 지도했다.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 후 스승의 지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정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