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을 꼽자면 황진이, 이매창, 허난설헌이다. 다 알다시피 황진이, 이매창은 기생이었고 허난설헌은 허균의 누나로 양반가의 규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시 세계는 서로 판이하다. 황진이가 열정과 낭만이었다면 이매창은 그리움과 애잔함이었고 허난설헌은 고독과 쓸쓸함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둘러내어
춘풍 이불 밑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신 날 굽이굽이 펴리라
역시 황진이는 화끈하다.
이매창은 기다림 속에 애가 끓는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여라
남편과의 애틋한 사랑도 없고 자식도 다 잃은 허난설헌은 홀로 절대의 고독을 읊조린다.
서쪽 연못에 봄비가 자욱이 내리니
가벼운 한기 비단 휘장으로 스민다.
시름에 겨워 병풍에 몸을 기대니
담 모퉁이에서 살구꽃이 지는구나.
부안은 기름진 들녘과 빼어난 변산, 칠산 앞바다의 풍요로움이 있어 일찍부터 시와 풍류를 즐기던 전통이 있다. 이매창과 그녀의 연인 유희경이 있었으며 근래에는 신석정 시인이 있었다. 내소사와 개암사 등 내력 있는 사찰도 있다.
1993년에는 나의 스승이신 에밀레박물관 조자용 박사님이 끊어져 가던 부안 내요리 돌모산 당산제를 살려야 한다며 온 힘을 쏟으셨기에 나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마을 축제를 살리자는 박사님의 뜻은 김포 대명리포구 풍어제, 인사동 거리축제, 속리산 구병리 서낭당 복원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부안으로 가는 행로는 옛 추억과 함께 항상 마음이 들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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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의 묘. 매창을 아끼는 이 고장 사람들은 기생이라 부르는 것을 꺼려 명원(名媛)이라 적었다. ‘이름이 알려진 재주 있는 미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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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요리 돌모산 당산. 이 동네 사람들은 짐대할머니라 부른다. 마을의 수호신이다. 정월에 줄다리기한 새끼줄을 새로 감는 것을 새 옷 입혀드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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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읍내 서문 안 당산. 조선시대 부안 읍성 서문에 배치했던 것으로 숙종 15년(1689)에 세웠다. 물론 남문과 동문에도 세웠다. 전염병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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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안 당산도 장승 한 쌍과 솟대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 때 1688년 1만 명, 1698년, 2만 3,128명, 1699년 25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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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을 막을 방법이 없으니 액막이 장승이 등장한 것이다. 벅수라고 불렀으나 일제가 장승으로 강제 통합시켰다. 원래 장승은 길거리 표시 장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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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대웅보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36년에 계호 선사가 중건했다. 울금바위를 배경으로 장중하고도 화려해 조선 후기 건물로는 가장 뛰어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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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전라도 사찰은 거의 전소됐다. 중건하며 법당 지킴이로 방위신이 등장했다. 동쪽 추녀 밑에 사신(四神) 중에 청룡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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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서쪽 추녀 아래에는 당연히 백호를 모셨다. 법당을 중심으로 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된다. 법당 좌우 벽에 청룡, 백호 그림도 많이 그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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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룡 중에서 총대장은 중앙의 황룡이다. 용은 또한 수신이기 때문에 법당 지킴이로 안성맞춤이다. 현판 위에 청룡, 황룡 정면상 조각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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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위에 놓는 주두(柱頭)는 공포를 받치는 용도이지만 개암사 주두는 연잎 모양으로 다듬어서 올렸다. 또 연잎 주두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정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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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안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큰북이다. 옛날의 큰북은 통나무를 통째로 안을 파내고 양면을 암소와 수소 가죽으로 마무리했다. 보기 힘든 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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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천장에는 용이 9마리 배치돼 있다. 충량에 두 마리, 사방 귀퉁이에 네 마리, 불상 정면 위에 세 마리다. 9룡은 가장 상서로운 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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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머리만 조각해 놓는 것이 조금 미진하다고 생각했을까? 한 구석에는 비죽이 튀어나온 용의 꼬리가 보인다. 선조들의 해학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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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나라는 어지럽고 민생은 어려웠을 때 사찰들 역시 얼마나 힘들었을까? 천장 꼭대기 벽화에 유람온 사람들의 낙서가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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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스님들이 지키기 힘든 시절도 있었다. 그런 낙서들이 여러 법당에 아직 남아있다. 용 위의 봉황은 연꽃 줄기를 물고 있다. 날개를 편 봉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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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 편액은 김석천(金石川)이라는 아이가 9세에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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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開巖寺) 편액은 8세 김예산(金禮山)이 썼다. 개암사는 이매창이 죽었을 때 부안의 문우들과 아전들이 함께 ‘매창집’을 엮어 출간한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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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동종은 숙종 15년(1689)에 주조한 것이다. 용머리 용뉴와 사각 틀 안의 솟아난 9개 유두는 신라양식이고 보살상이나 범어 글자는 조선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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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내가 쓴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는 장승과 용에 대해 자세히 실었다. 세종도서에 선정됐으며 블교출판문화상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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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간 『사찰 속 숨은 조연들』은 금강역사, 사천왕, 저승사자, 동자 등 다양한 조연들을 조명했다. 휙 스쳐 지나가던 인물들의 연원을 탐구한 책이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