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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자끄 라캉의 정신분석과 불교의 만남

2017년 7월 불교평론 열린논단

불교평론이 매월 개최하는 열린논단 2017년 7월 행사를 영상으로 중계 해드립니다. 이번달 주제는 '라깡의 정신분석과 불교의 만남' 입니다. 

- “자끄 라캉의 정신분석과 불교의 만남”
- 발제 : 김석 교수(건국대 인재융합학부)


임상경험에서 출발하는 정신분석과 해탈과 수양을 강조하는 불교는 상보적 대화는 가능할 것인가?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이 이론성립의 배경이나 강조점과 지향점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에도 많은 공통점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나아가 프로이드를 이어받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불교사상과 자신의 욕망이론과 친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상이성이 있을까요. 열린논단은 이런 관심을 가지고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을 통해 불교를 들여다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이번 모임에서 발제자에게 정신분석과 불교사상의 평면적 비교보다는 욕망, 환상, 타자와 주체 같은 몇몇 키워드를 중심으로 양자 간의 상보를 위한 대화를 시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발제자는 정신분석이나 불교는 그릇된 집착이나 소외를 유발하는 나르시시즘적 정념을 벗어나 존재의 비실체성, 즉 무(무, néant)에 관한 사고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불교가 적극적인 해탈(解脫)과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가능성과 실현을 강조한다면 정신분석은 존재의 모순성이 구조적임을 강조하는 점에서 부정성의 철학과 통하는 면모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불교와 정신분석의 접점을 살펴보고 특히 정신분석의 창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는 방법을 깊게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발제를 맡은 김석교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을 거쳐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자크 라캉의 욕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입니다. 귀국 후에는 철학아카데미, 고려대, 시립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2012년부터는 건국대학교 융합인재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정신분석 개념과 이론을 적용해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와 사회, 정치 현상을 분석하면서 인문학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이 분야 최고전문가입니다.

불교평론 편집위원회 /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합장

- 장  소 : 불교평론 세미나실 (강남 신사동, 3호선 신사역 8번 출구 부근)
- 주  관 : 불교평론 편집실 (739-5781) , 경희대 비폭연구소
- 중  계 : 불광미디어


I. 욕망을 통한 불교와 정신분석의 대화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선불교는 유사성이 많다고 말하면서 양자에 공통된 도덕적 오리엔테이션을 억압과 욕탐을 제거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깨닫고 완성하는 성숙함과 자유에서 찾는다. 에리히 프롬, 「선(禪)과 정신분석」, 『서양철학과 선』, pp. 77-107.

프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불교와 정신분석에는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으며 라캉 스스로 『세미나 10, 불안』에서 불교와 정신분석의 친화성을 강조한다. 필자는 불교와 정신분석의 상보적 대화를 위한 키워드를 ‘욕망’에서 찾으려고 한다. 불교와 정신분석은 육체를 지니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면서 경험하는 불안, 좌절과 고통, 그리고 좌절 속에서 욕망을 지속시키는 환상을 탐구한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양자는 욕망자체를 무조건 긍정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욕망에 대한 바른 인식과 태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실천적 방향을 진리나 지혜(반야, 般若)와 연관시킨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말하는 진리나 불교의 지혜는 진정한 주체나 참된 자기를 찾는 것과 연관이 있다.

불교와 정신분석을 비교한 기존 선행연구는 주로 ‘무아론’이나 주체이론, 혹은 불교의 아뢰야식과 무의식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지점은 욕망이다. 라캉은 정신분석 경험은 “욕망의 풍부한 기능”(Lacan 1986 : 11)이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도록 했으며,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적 실천은 “어떤 본원적 욕망에 의존하고 있다”(Lacan 1973/2008: 17)고 말한다.

라캉은 주체의 본질이 욕망이라고 말하면서 정신분석의 장에 욕망을 핵심범주로 위치시킨다. 자아와 주체, 무의식의 지위와 윤리, 진리의 문제는 욕망을 매개로 해명할 수 있다. 이 점은 삶의 고통과 번뇌를 갈애(渴愛, tṛṣṇā)( 불교의 갈애는 쾌락을 향한 탐욕의 상태로 사성제의 ‘집(集)’, 즉 집착에서 기인하며 인간이 경험하는 괴로움과 윤회를 낳는 원인이다. 라캉이 말하는 소외된 욕망은 갈애와 동일하지만, 윤리적 맥락에서 양보하지 마라 말하는 욕망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대한 갈망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욕망에 대해서는 안성두,「불교에서 욕망과 자아의식」을 참조하라. )에서 찾으면서 그것의 소멸을 주장하는 불교의 입장과 언뜻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갈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근본 무지이자 번뇌라 할 수 있는 무명(無明, avidyā)때문이고, 무명을 걷어내고 진정한 자기(진여, 眞如)를 찾을 것을 불교가 권장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욕망을 부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탈(解脫, vimoksa)의 욕망을 권장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욕망이나 해탈은 참된 존재를 찾으려는 열망(passion)이다.

정신분석이 욕망을 통해 불가능성처럼 나타나는 실재(réel)에서 존재의 자리를 찾기 위해 욕망을 윤리적으로 긍정한다면 불교는 ‘지혜의 완성’(칼루파하나 1996: 252)을 통해 본래적 불성을 회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양자가 욕망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하면서 소외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는 점 (Jeffrey B. Rubin은 “A Well-Lived Life: Psychoanalytic and Buddhist Contributions"에서 정신분석과 불교는 각각 ‘깊은 자기-탐구’와 ‘자기-자각’을 통해 ‘좋은 삶’(good life)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두 가지 지혜라고 설명한다. 두 사상이 좋은 삶을 공통적으로 겨냥한다는 관점은 에리히 프롬처럼 정신분석의 최종 목표를 치료와 자아의 강화를 통한 사회적응에 두는 자아심리학 경향을 전제로 할 때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분석과 불교는 행복이나 구원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한 태도와 진리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을 찾아야 한다. 참조, (Jeremy A. Safran 2003: 387-425) 에서 통할 수 있다.

본 논의를 통해 제시될 이론적 성과는 향후 양자의 주체이론이나 무의식 분석 같은 차후 주제를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I. 욕망과 갈애

정신분석은 욕망을 존재에 대한 열정(passion)이자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보면서 긍정한다. 반면 불교 특히 아비달마에서는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마음의 상태를 갈애라고 보면서 그것이 모든 윤회와 고통이 원천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만을 보고 정신분석은 욕망을 긍정하고 불교는 욕망을 부정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자아의 헛된 집착에 근거한 갈애를 부정하지만 해탈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면서 역으로 해탈의 욕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에서 욕망이 중요하게 된 것은 라캉 덕분이다. 라캉은 욕망 개념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재해석하고 철학적 색깔을 입히면서 욕망을 정신분석 장의 본질적인 지평으로 정의한다. 프로이트가 리비도 에너지 관점에서 무의식의 역동적 측면과 그것이 일상적 삶에 침투하는 다양한 양상을 강조했다면 라캉은 주체를 언어의 효과로 정의하면서 ‘욕망의 주체’라는 개념을 정신분석의 핵심 범주로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치료하면서 무의식에 대해 확신했고 그것의 주된 메커니즘을 억압된 성적욕망과 연결시켰다. 이러한 입장은 나중에 유아성욕론과 충동(Trieb)이론으로 구체화된다. 리비도(Libido)에 근거한 성 충동이 주로 대상에 대해 표출되기 때문에 정신분석이론에서는 성적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몸을 비롯한 대상과 맺는 관계 (프로이트는 구순기, 항문기에는 자신의 몸을 리비도 집중의 대상으로 삼는 자가성애가 주된 양상이며 성기기에 접어들어 이성을 대상으로 삼는 성충동이 개화한다고 말한다. 남근기에 겪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는 어머니의 몸을 대상으로 한 대상충동과 자가성애의 갈등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프로이트 이후 어니스트 존스, 멜라니 클라인 등에 의해 정교하게 발전하면서 치료의 기법과 관련해 중시된다. 필자는 정신분석의 핵심은 대상관계가 아니라 충동을 포함한 욕망의 다양한 표출양상과 그것의 윤리적 ․ 존재론적 지평에 대한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 를 중시한다.

하지만 라캉은 욕망과 충동을 대상자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결여에 대한 관계로 설명하는데 여기서 결여가 걸리는 대상은 존재(être)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에 대한 존재적 관계”(rapport d'être à manque) (Lacan 1978: 261)라고 정의한다. 존재결여는 존재라는 것이 언어에 의해 완전하게 의미화 되지 않고 일종의 공백(vide)이나 무(néant)처럼 남는 다는 말이다. 여기서 ‘존재적 관계’rapport d'être라는 용어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주체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언제나 ‘~에 대한 관계’를 통해 정립되는데 라캉은 ~에 걸리는 것이 결여라고 말한다. 라캉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언어가 사물들을 잃어버린 대상처럼 만들면서 그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근본적인 부정성의 구조 x로 만든다는 것이다. 주체가 결여를 중심으로 구조화 되어 있기 때문에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지 대상 때문에 욕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아니라 대상에 집착하는 상태를 라캉은 소외라고도 말하면서 주체는 기표질서에 의해 대변되는 부분과 그것에서 벗어나는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라캉이 욕망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분열 속에서 소외되는 존재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대상에 대한 집착처럼 표출되지만 근본적으로 존재결여의 관계이기 때문에 ‘다른 대상’ (autre chose)을 향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순환 운동처럼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욕망은 텅 빈 기호로서 ‘대상 a’ (objet a)만을 원인이자 대상으로 가진다고 말한다. ‘대상 a’는 주체가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잃어버린 부분 ("주체는 항상 대타자 속에서 실현되지만 절반을 잃어버린다”(Lacan 1973/2008: 172) 을 환상 속에서 지시하는 존재의 기호라 할 수 있다. 결국 욕망은 존재보존을 향한 의지이자 그것을 되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욕망이 끈질기게 계속되는 것이 존재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지만 자칫 대상관계 속에서 소외될 수 있다면 여기서 욕망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욕망자체는 부정해야 할 악덕이 아니지만 소외된 욕망 혹은 잘못된 욕망은 문제라는 것이다.『정신분석의 윤리』라고 제목이 붙은 세미나 7권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욕망의 본질을 정의 하면서 그것이 윤리적 지평에 연결되는 이유에 대해 논의한다. 전통 윤리가 대상에 의존하는 선(아리스토텔레스)이나 주체의 쾌락(공리주의)을 지향한다면 정신분석의 윤리는 존재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 원칙을 “단 하나의 비판 그것은 욕망을 양보하는 것”(Lacan 1986: 370)이라고 명확히 한다. 라캉은 우리가 욕망을 회피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절대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욕망의 윤리는 대상이나 사회자체의 이익을 중심으로 선을 탐구하는 그런 윤리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개인 삶의 비극적 차원에 뿌리를 내린다(참조. Lacan 1986: 361). 비극적 차원이란 삶에서 느끼는 고통, 병리적 현상, 좌절을 말하는데 왜 라캉은 욕망을 삶의 비극적 차원에 뿌리를 내린다고 했을까? 그것은 비극적 차원이 주체가 잃어버린 것이 실재계(réel)에 속하며 이것이 인간 현존재의 삶에서는 존재 결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라캉이 욕망을 주체의 실존적인 존재보존 노력으로 본다면 불교는 존재와 욕망에 대해 좀 더 포괄적이고 우주론적인 접근 방법을 취한다. 정신분석이 욕망에 대한 분석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적인 것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주체의 차원을 강조한다면, 불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만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전제로 삼는 일체론적 세계관에 가깝다. 이 일체는 “다양한 인과관계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유위(有爲)’의 존재” (사쿠라베 하지메, 우에야마 슌페이 2004: 51)로 개체적인 삶과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다. 이러한 우주론적 원리를 바로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물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은 그릇된 욕망의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데 이것이 필자가 근본적 지혜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새로운 욕망으로 보는 이유이다. 불교는 번뇌와 윤회의 원인이 되는 욕망의 추구를 갈애(渴愛)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과적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맹목적 의지에 휘둘리는 무명(無明)에서 나온다. 무명은 “고통과 그 원인, 그것의 소멸과 그것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무지”(Samytta-Nikāya II. 4)  (여기서는 안성두, 「불교에서 욕망과 자아의식」에서 재인용.) 의 상태로 마음이 오염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무명이란 하나의 실체나 고정된 심리 상태가 아니라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맹목적 성향에 이끌리는 심리상태를 말하는데 정신분석이 말하는 맹목적 충동과 흡사하다. 무명을 갈애의 원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교가 욕망에 대한 분석에서 존재론적 입장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바른 사유와 벗어남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적 태도에 가깝다.

이것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사트바 카르만(sattva-karman, 중생의 업)에서 기인하는 삶의 조건으로 확인하면서 이에 근거해 차례로 苦→集→滅→道의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수행의 방향과 원리를 제시하는 사성제(四聖諦)에서도 암시된다. 여기서 두 번째 집제가 갈애의 본질이다. 갈애는 보통 세 가지 양상으로 설명되는데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애(kāma-tanhā, 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nhā, 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nhā, 非有愛)” (Vinaya I. 6.20) (여기서는 안성두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 )가 그것이다.

욕애는 탐욕과 탐심에 사로 잡혀 대상을 좇는 것이며 성적 욕망을 포함한 쾌락의 추구를 포함한다. 유애는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망과 관련되며, 비유애는 생의 소멸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삼종의 갈애를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캉은 욕망을 ‘존재결여’로 보면서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인 일종의 코나투스를 긍정한다. 존재에 대한 욕망은 대상에 대한 욕망과 당연히 구분되기에 불교의 교리에 대입하면 욕애는 똑같이 경계의 대상이다. 대상에 대한 욕망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상상적 작용이며, 욕망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망상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유애와 비유애는 정신분석의 윤리에서는 존재의 열정으로 긍정될 수 있다. 정신분석이 욕망이 직면하는 ‘고통’ (souffrance), ‘정념’(passion)을 욕망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한계를 부과하면서 그 한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는 일종의 작용인 (cause efficiente)처럼 긍정한다면, 불교는 이러한 정서적 상태를 속박처럼 보는 데서 결정적 차이가 있다.

이것은 불교가 갈애를 미혹이나 무지의 상태인 무명의 작용처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애나 비유애가 겨냥하는 존재와 정신분석에서 욕망이 겨냥하는 존재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존재에 대한 열정으로서 욕망이 정신분석에서 긍정되는 이유는 욕망이 겨냥하는 존재가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자아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개념과 표상의 질서를 벗어나는 또 다른 주체임을 전제할 때 제대로 이해된다. 만약 불교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탈을 통해 소외된 자아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의 회복을 욕망에서 강조한다면 정신분석이 말하는 문제의식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결국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수행과 반야를 통해 말하려는 것이 자아의 소멸에 그치지 않고 스즈키의 말대로 자기 존재의 핵심에 깊이 도달하는 내적 자각, 즉 자증(自證)의 강조에 있다면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을 끌어낼 수도 있다. 돈오(頓悟)가 목표로 하는 진리가 참다운 존재에 대한 자각이라면 외형상 두드러져 보이는 개념적 구분에 근거해서 정신분석과 불교의 욕망이론을 대립시키기 보다는 욕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불교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사상에 기초해 무아론(anātmavāda)을 주장한다면, 정신분석도 자아의 망상적인 성격과 소외의 본성을 강조하면서 보다 확실한 존재에 대한 개념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불교는 갈애의 소멸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주체를 찾으려는 해탈의 욕망을 주장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III. 무아론과 리비도 주체

불교의 갈애개념이 겨냥하는 바를 좀 더 분명히 하고 정신분석과 통하는 점과 차이를 동시에 이해하기 위해 불교의 무아론 (무아론에 관한 두 가지 해석과 논쟁이 있다. 하나는 무아론을 “오온은 자아가 아니다”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비아론의 입장으로 무아론이 자아자체를 배격한 것이 아니라 자아가 아닌 것을 자아로 보는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참된 자아를 찾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무아론의 원래 의미에 충실하여 인간을 오온의 화합물로 간주하고 자아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전자는 비아론에 맥락에서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자아를 실체처럼 가정하는 문제점이 있으며, 후자는 무아를 극단적으로 주장하다보면 해탈이나 성불도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자경은 두 입장에 다 문제가 있으며, 자아 실유성(實有性)을 부정하는 무아의 차원과 무아를 무아로 바로 아는 진여(眞如)의 차원을 구분하고 종합함으로써 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자경, 『불교의 무아론』, 제1장 무아론의 의미 pp. 17-43 참조. ) 을 자세히 살펴보자.

불교는 한결같은 실체로서의 자아, 모든 행동과 욕망의 출발점이 되는 자아개념을 부정한다. 그것은 불교가 기본적으로 무아론(無我論)적 입장에서 자아라는 것을 ‘나’라는 잘못된 생각과 집착에서 찾으면서 오온(五蘊, panca skandha)에 불과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온은 물질적인 것을 지칭하는 色(rūpa)과 심리적인 것인 名(nāman)으로 이루어지며, 명은 다시 受(vedana), 想(samjna), 行(samskhara), 識(vijnana)의 집합이다.

오온에서 말하는 색은 단순히 질료적 의미의 육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은 물론 인식작용을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나머지 네 가지와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심리적 과정인 명의 작용에서 수(vedana)는 감각적인 작용, 상(samjna)은 지각 혹은 표상작용, 행(samskhara)은 의지와 행동, 식(vijnana)은 식별 작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자아가 단지 오온의 작용에 불과하니 경계해야한다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부처의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다.

“다섯 가지 취한 근간이 있으니, 이른바 색의 취한 근간과 느낌⋅생각⋅결합⋅식별의 취한 근간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범부들은 슬기도 없고 밝힘도 없어서 다섯 가지 취한 근간에서 ‘나’라는 소견을 내어 거기에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고 탐욕을 낸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슬기도 있고 밝힘도 있어서 그 다섯 가지 취한 근간에서 ‘나’를 보아 집착하여 마음을 얽매거나 탐욕을 일으키지 않는니라” (고익진 455).

결국 일체의 작용은 오온의 상호 연기적 작용의 산물이기에 항상 되지 못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무명이며, 헛된 자아관념에 매일 때 모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무아론은 현상 일체를 12처와 18계로 보면서 그것의 작용에 의한 만물의 소멸과 순환을 ‘12지 연기설’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사상으로 구체화된다.

12지 연기설이란 인연에 따른 생성의 사슬법칙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가 계속해서 변하고 소멸한다면 항구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우주는 무명(無名)→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의 순환에 다름 아니다. 이 순환은 일회적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면서 반복하는 끊임없는 연기의 사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교는 자아가 경험하는 모든 일체의 사건이나 현상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주체적인 차원을 완전히 배제한다고 볼 수 있을까? 불교는 비록 실체로서 자아, 모든 인식과 행동의 근거가 되는 중심점으로서 자아는 인정하지 않지만 자기의 본원적인 어떤 차원이 있음을 인정한다. 불교는 업(業, karman)이 발생시키는 결과의 필연성과 자업자득의 두 원칙에 의해 선악의 근거가 성립된다고 보면서 윤회를 행위의 결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행위를 신업(身業), 어업(語業), 의업(意業)의 3종으로 나누는데 이 중에서도 마음의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 (사쿠라베 하지메, 우에야마 슌페이 2004: 94) 참조.

마음의 행위가 강조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작용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숨겨진 나쁜 경향이나 자질 (이것을 불교는 수면(隨眠, anuśaya)이라 부른다. )이 윤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선악개념이 행위의 주체를 온전히 전제하지는 않지만 생의 순환과 상호작용에서 의지적인 차원을 전제하기에 번뇌나 유위에 의한 삶의 고통과 벗어남, 즉 수행과 해탈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진리의 관지를 반복함으로써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는 해탈의 경지는 주체적인 차원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무아론은 동일성, 자족성, 독립성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입장이지 심리적인 인과관계 일체를 부정하거나 공(空)을 존재의 전부처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가 오온과 경험적 자아의 관계를 램프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가세나의 설명에 따르면 오온이 연료라면 경험적 자아는 이 연료에 기대어 타오르는 불빛과 같다. 불빛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연료이며 불빛은 시시각각 변하는 하나의 현상이지만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밀라다왕문경』1, 89-90쪽 참조. )

존재의 요소들은 단지 흐름 속에 있을 뿐이지만 그 흐름자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인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회의하면서도 경험현상에 주목하면서 의식이나 지각의 흐름을 주체성의 내용으로 설정하는 경험론과 흡사하다. 예컨대 흄은 영혼이 실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지각의 확실성과 그 흐름만을 인정한다. 흄은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실재로서 자아나 주체를 정의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심리적으로 체험하는 지각현상과 그것의 상호작용이 의식현실임은 인정한다.

“인과에 관해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정신의 참된 관념은 정신을 서로 다른 지각 또는 서로 다른 존재의 한 체계로 간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각 또는 존재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 함께 결속되고 서로 산출하고 파괴하며 영향을 미치고 서로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흄 1994: 265).

이것은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면서도 주체의 경험적 측면을 연기적으로 작동하는 상호 인과론적 맥락에서 인정하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할 것을 주장하는 불교적 사고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말하는 새로운 주체이론도 흄과 비슷한데 언제나 현실을 정초하는 상상계의 기만성과 주체의 불안정한 지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불안정한 지위란 바로 주체의 소멸을 가져오는 자리로 우리는 이곳에 있는 주체를 상상적 자아에 대립하여 ‘리비도 주체’ (sujet libidnal) (리비도 주체는 기표가 대리하는 담론 속 주체가 아니라 그 밑으로 사라지는 주체를 말한다. 리비도 주체는 존재결여 자체에 동일시함으로써 비존재(désêtre)적 궁핍화를 통해서 일자(Un)로 존재하는 그런 주체이다. 타자가 없는 일자로서 주체를 라캉은 분석의 끝에서 찾는다. J. Lacan, Vers un signifiant nouveau, in Ornicar?, p. 18 참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리비도 주체란 라캉이 ‘무의식의 진정한 주체’ (Lacan 1966:417) 혹은 ‘우리존재의 핵’(Kern unseres Wesen, Lacan 1966: 526)이라 부른 것이다. 상상계의 주인인 자아가 코기토(cogito)이미지에 매달린다면 ‘리비도 주체’는 지젝이 ‘향유의 원환고리’라고 불렀던 숨(sum), 즉 존재에 해당한다.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도서출판b, ‘향유의 원환고리’는 이 책3부의 전체제목이다. )

리비도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되면서 결여로 남지만 그 결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존재이다. 즉 리비도 주체는 부정의 방식으로 자신을 긍정하면서 새로운 대상을 창출하는 것으로 라캉은 이것을 박막(lamelle)이라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박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기관…이다. 이것이 바로 리비도이다. 이것은 리비도, 삶의 순수한 본능으로서의 리비도다. 말하자면 불사의 삶, 억누를 수 없는 삶, 어떠한 기관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삶, 단순화되고 파괴 불가능한 삶에 대한 본능이다. 이는 정확히 생물이 유성 생식의 주기를 따름으로 인해 상실하게 되는 부분이다. 대상 a로 열거할 수 있는 형태들은 모두 그 잃어버린 것의 대표자, 등가물이다. 그러니까 대상 a는 순전히 그 잃어버린 것의 대표자, 문양에 불과한 것이다”(Lacan 1973/2008: 180. 강조필자).

리비도란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상징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하나의 기관으로 라캉은 이를 비현실적(irréel)이라는 형용사로 규정한다. 비현실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실재(réel)와 접속하는 것이다(Lacan 1973/2008: 187 참조). 실재란 주체가 오이디푸스 과정을 통해 상징계에 자리 잡을 때 잃어버린 것으로 자신의 몸이기도 하고, 말하는 주체에게 언제나 쾌락원리의 너머(l'au-delà du principe de plaisir)처럼 제시되는 부분이다. 쾌락원리 너머는 역설인데 말하는 주체에게는 그것에 접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이 욕망을 상징계와의 관계에서 지속시키는 원인이다. 말하는 주체는 존재결여를 언제나 죽음의 효과처럼 경험하는데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죽음과 욕망의 본질적 관계에 대해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우리가 말의 연속적 놀이 이전에 있었던 것, 그리고 상징계의 탄생에 선행하는 것을 주체 속에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 속에서만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주체의 존재는 그것이 의미로 가지는 모든 것을 취한다. 결국 주체는 타자들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죽음에 대한 욕망처럼 확증한다”(Lacan 1966: 320).

죽음에 대한 욕망은 주체가 몸담고 사는 상징적 질서인 현실(réalité)을 뒤흔들고 삶의 근원적인 고통이자 파토스처럼 주체를 사로잡는다. 그러기에 말하는 주체가 느끼는 원초적인 욕망의 불가능성은 고통이기도 하지만 존재에 대한 체험이라는 면에서는 긍정될 수 있다. 욕망이 주이상스(jouisance)와 결합하는 지점이 정확히 이곳이다. 주이상스는 주체에게 금지된 대상을 향한 불가역적인 충동인데 이것은 언제나 의미화를 벗어나서 지속하려는 존재에 대한 향유의지와 이에 뒤따르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젝이 즉 존재를 향유의 원환고리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라캉이 주체의 분열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현실 질서에서 소외되어 있지만 삶의 토대가 되는 리비도 주체의 진정한 자리다. 불교가 무아론을 통해 자아의 무상함과 번뇌를 지적하면서 상호의존성(相依性)이라는 제법(dharma)의 규칙성(法決定), 즉 연기성(緣起性)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했다면 라캉은 소외와 욕망을 통해 삶에서 주체의 진정한 자리가 어디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불교나 정신분석은 둘 다 서구사상에 뿌리 깊은 주객이원론이나 표상적 대상화의 논리, 즉 과학적 이성주의를 거부하면서 그릇된 집착이나 나르시시즘적 정념을 벗어나 존재의 비실체성, 즉 무(무, néant)에 관한 사고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라캉이 불교에 매료된 것도 무에 대한 절대적 사고 때문이었다. 이점은 진리의 문제와 연결된다.

IV. 진리와 지혜

불교는 존재의 무상(無常)과 비실체성을 모르는 근본무명이 현상적인 것에 집착하도록 만들면서 삶의 번뇌와 고통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것을 멸하는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수행은 해탈을 지향하는데 해탈을 위해 필요한 절대적 지혜가 바로 ‘반야’(般若, prajñā)로 그것이 수행의 목표다. 불교의 진리개념에서 주목할 점은 근본무명과 미혹을 멸하기 위해 주체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주지주의적 면모이다. 이것은 “진리가 스스로 말한다”(Lacan 1966: 409)면서 진리를 실재(réel)가 드러나는 사태에 연결시키는 정신분석 입장과 대조된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노력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涅槃, nirvāna)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강조하는 구원의 담론이다. 정신분석이 욕망의 윤리를 통해 욕망의 충족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강조한다면 불교는 초월성에 이를 수 있다는 낙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불교가 말하는 지혜인 반야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나 처세술이 아니라 존재전체의 이치를 관조하는 것으로 스즈끼 다이세쓰가 말한 것처럼 선험적 직관에 가깝다. (스즈끼 다이세쓰, 「선이란 무엇인가」, 『서양철학과 선』, p. 208 참조. )

반야는 법(dharma)의 이치에 계합한 ‘더없이 완전한 지혜’ 혹은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로 부르며 반야를 얻어야 성불이 가능하다. (이대성 2004: 194) 참조.

반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깨닫는 근본적이고 초월적인 절대 지혜다. 반야를 통해서 만물의 법칙과 본진을 깨닫고 중생을 망가뜨리는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야는 존재, 특히 자아의 무상성에 대한 깨달음이자 참된 주체의 자리를 바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함경』에는 많이 아는 제자가 자아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그는 무명과 욕심을 떠나 밝힘을 내기 때문에 ‘나는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니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훌륭한 것도 아니요, 내가 못한 것도 아니며, 내가 저와 같은 것도 아니며, 내가 아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는 것도 아니다’고 생각한다”(고익진 2006: 457).

부처의 이 말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Lacan 1966: 517)의 라캉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가 말하는 지혜도 자아의 상상적 본성에 속지 말고 진정한 주체의 자리를 알아보는 것을 강조하는 정신분석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는 진리개념을 통해 마음의 본래 청정한 상태를 회복하고 부처처럼 될 것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견성성불’(見性成佛) 개념에서 엿볼 수 있다. 견성성불이란 자성을 알게 되면 부처가 된다는 뜻으로, 본래적인 인간의 성품에 불성이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기 만하면 도를 이룰 수 있다.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교리보다 본성에 대한 직관을 강조하는 선불교에서 강하다.

 선불교에 의하면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하지만 집착과 망상에 의해 염오되면서 무명의 상태로 변질된다. 그러므로 수양을 통해 집(集)을 떨쳐내고 거울 같은 마음을 회복한다면 무명을 명(明)의 상태로 바꿀 수 있다. 선이란 초자연적인 것을 접하는 황홀경에 대한 극한 체험이 아니라 깨달음(satori)을 통해 본래의 마음을 재발견하는 지혜에 가깝다. 이것이 참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스즈키는 선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선(禪)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에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프롬, 「선과 정신분석」, 『서양철학과 선』, p. 23.

견성성불이란 깨달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원이 이미 마음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있는 본래 실재의 참모습을 왜곡 없이 관조할 것을 요구한다. 정신분석도 욕망을 통해 언어와 표상에 가려지는 존재의 참모습을 제시하면서 근원적인 존재를 그 자체로 발견하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강조한다 하지만 정견(定見)과 지혜(반야)를 통해 억압과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고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가 더 낙관적이고 초월론적인 존재론을 가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 정신분석이 말하는 진리 개념을 살펴보자. 진리는 근본적으로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언제나 무의식적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주체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지식으로 정의하기도 하고, 의식적 담론의 연속성을 흔드는 어떤 결핍으로 보기도 한다(Lacan 1966: 258 참조).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은 언뜻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혼란시켜 참된 지혜를 가로 막고 갈애를 낳는 무명개념과 상당히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라캉은 무지(ignorance)를 깨달음의 부족이나 불완전한 지식이 아니라 존재의 토대를 이루는 근본 정념으로 본다. (“무지는 여기서 지식의 부재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무지는 오히려 사랑과 미움에 대한 존재의 정념이다”(Lacan 1966: 358).

무지가 존재의 속성이라는 생각은 정신분석 진리 개념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그것은 무지에 가려진 사물의 본성을 깨닫는 개오(開悟)가 아니라 지식이 현실화될 때 결핍으로 나타나는 어떤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가능성은 실재의 속성이며, 주체는 언제나 이 불가능성의 자리에 자리 잡는다. 라캉의 다음 설명을 보자.

“주체가 걸어가는 길은… 불가능한 것의 두 벽 사이를 통과한다. … 불가능한 것은 반드시 가능한 것의 반대가 아니다. 혹은 오히려 가능한 것의 대립물이 당연히 실재이므로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Lacan 1973: 152).

이 불가능성은 언제나 상징계의 구멍처럼 남는 것으로 존재의 본 모습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전면화하고 주체 스스로 이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것이 정신분석적 진리가 겨냥하는 것이다. 임상적 실천에서도 마찬가지로 분석은 깨달음이나 자아의 적응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결여에 대한 올바른 태도의 정립을 목표로 한다. 라캉이 꽉 찬 말과 텅 빈 말을 대립시키고, 거짓말이나 말실수가 진리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면서 존재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초기에는 언어의 미끄러짐을 보여주는 무의식의 수사학을 지칭하며 70년대 이후에는 실재와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분석의 끝은 프로이트가 불안의 출발점이라 불렀던 근원적인 분리, 즉 출생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라캉은 분리가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결여가 어떤 대상에 의해 채워지려 할 때 주체가 불안을 느낀다고 강조한다(참조. Lacan 2004: 66-67).

결여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욕망하는 존재로 만들면서 존재하는데 이 결여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상상적인 것이 주체를 압도하면서 위협하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결국 결여의 결여가 불안의 원인이다. (맹정현은 『리비톨로지』, ‘제3장 불안의 리비톨로지’에서 불안과 욕망이 리비도적 결정론에 의거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불안은 욕망이 실현되려고 할 때, 즉 결여의 결여가 생길 때 발생하는 경고가 불안이라고 강조하는데 타당한 지적이다(맹정현 2009: 60-84) 참조. )

이런 이유로 분석의 목표도 치료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비실체성과 주체의 궁핍함을 그 자체로 유지하면서 대타자의 과도한 향유에 휩쓸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여를 대면하기 위해 욕망은 치료의 끝에서 다시금 환상 속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이처럼 환상과 환상 가로지르기를 동시에 필요로 한다. 라캉은 『세미나 10권 불안, Angoisse』에서 불교에 대해 말하면서 “욕망은 망상이다”(Lacan 2004: 257)라는 깨달음이 불교가 주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캉은 욕망이 망상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의 구조적 연관성을 더 강조한다. 욕망은 환상을 매개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욕망의 망상적 성격을 경계하는 불교와 많은 차이가 있다. 라캉은 환상을 진리에 연동시킨다. 물론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존재의 비 실체성과 관련이 더 깊다.

“문제가 되는 진리는 최후의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망상의 옆에서 존재의 기능을 엄밀하게 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망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이 이 아무 것도 아닌 것(rien) 위에서 어떤 지지물, 어떤 출구, 어떤 목표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Lacan 2004: 257-8).

라캉은 선불교가 강조하는 무(無)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의 사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불교도 결국 실체론적 공백이 아니라 ‘대상을 갖지 않음’ (ne pas avoir)을 지향한다고 해석한다(Lacan 2004: 258). 욕망은 존재를 겨냥하기에 특정한 대상을 갖지 않으며, 이것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욕망이 언제나 환상의 형대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욕망이 환상 가운데서 마주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환상을 가로질러 존재에 이를 필요가 있다. 불교가 말하는 망상(illusion)을 라캉은 주체가 자신의 존재보존을 위해 욕망을 능동적으로 무대화하고 지속하는 환상(phantasme)으로 긍정한다. 하지만 라캉은 모든 환상을 옹호하지는 않는데 환상은 주체의 거세를 감추고 환상자체에 고착되게 만드는 방어적 기능도 행사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긍정하는 환상은 대상을 통해 결여를 방어하는 회피적 환상이 아니라 거세자체를 관통하면서 자신의 결여를 전면화하는 것인데 라캉은 이를 ‘환상 가로지르기’(traversée du fantasme)라 부른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알고 나자 처음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의 결론에 도달하는 선사의 깨달음과 비슷하다. 환상은 여전히 주체의 결여에 대한 관계지만 환상을 가로 지른 후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무대화하는 진리의 향유 방식이 된다.

환상은 존재 결여에 주체가 대응하는 순수 행동이며 ‘리비도 주체’를 주체성의 내용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다. 리비도 주체는 존재론적 규정을 벗어나기 때문에 순수행위를 통해 사라짐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은 주체의 분열을 인정하면서도 무의 충만함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고, 상징계를 벗어나는 질서인 ‘실재와의 만남인 투케(tuché)’ (Lacan 1973:)를 욕망가운데 추구하는 것이다. 라캉은 상징계의 필연성과 자아와 주체의 분열을 주체가 초월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속박의 조건 혹은 강요된 선택을 적극적인 자유의 조건으로 만드는 주체의 영웅적 행동을 강조한다. 지젝이 강조했듯이 실존론적 조건인 유한성과 진리의 가능성인 무한성 사이에서 분열된 존재인 주체는 자신의 우연적 행위를 통해 모든 존재론적 구조를 지탱한다. (슬라보예 지젝 2005: 258-265) 참조.

그러므로 진리와 연동된 주체의 행위는 윤리적이며, 상징계를 포함한 세계의 구성가능성이 된다. 존재 결여에 대응하는 윤리적 행위가 결국 무로부터의 창조 ex-nihilo를 가능하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이 도기 때문이다.

V. 진정한 존재와 참된 자기의 탐구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불교와 정신분석은 욕망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취하고 서로 다른 목표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나는 지점이 적지 않고 겨냥하는 목표도 통한다. 불교나 정신분석은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착각과 미혹, 상상계에 의한 소외를 이야기하며 현존재가 사회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과 고통에 대해 해결하고 진정한 자기를 찾을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욕망을 무조건 긍정하고 발산할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소외된 욕망과 참된 욕망을 구분한다.

욕망이 환상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욕망을 대상이 아니라 무적 본성을 갖는 존재에 대한 관계로 인식하고 조정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결국 존재에서 비롯되며 존재를 향한 존재의 욕망이다. 불교역시 갈애는 자아의 항상성에 대한 그릇된 믿음과 집착에서 비롯되기에 일체의 법을 깨달아 번뇌를 끊고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해탈이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육근과 육경의 작용이 만드는 경계를 벗어나는 참된 앎을 통해 대상에 매이지 않는 마음, 즉 진여심(眞如心)을 얻는 경지이다. 불교가 수행을 통해 이러한 마음을 얻으려 하는 것을 해탈에 대한 욕망 혹은 참된 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정의한다면 정신분석의 윤리와 분명 만나는 지점이 있다. 정신분석이 자아를 거울 이미지의 반영에 불과하다보면서 ‘진정한 주체’를 찾을 것을 욕망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불교도 ‘무상(無常)의 자기’를 자각하고 ‘참된 자기’ 혹은 ‘근본주체’를 찾을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김수인에 따르면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철학자 히사마츠 신이치가 이런 입장에서 선(禪)의 유용성을 강조한다. 「깨달음의 철학과 주체지」참조.

불교나 정신분석은 욕망에 대한 태도에서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무 혹은 실재를 그 자체로 직시하거나 만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정의나 그것이 욕망에 미치는 효과는 서로 다르다. 불교보다는 정신분석이 실재의 부정성과 공백(vide)의 효과를 더 강조한다.

필자는 삶의 부정성과 모순을 자각하고 존재의 본성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진리나 지혜의 추구라는 방향에서 양자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상 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존재에 대한 탐구를 권하는 철학이다. 정신분석이 욕망에 윤리적 색채를 부여하면서 진정한 존재에 대한 탐구를 말한다면 불교는 반야와 해탈을 통해 ‘참된 자기’를 찾을 것을 권장한다. 이처럼 불교와 정신분석의 문제의식에는 통하는 점이 많음을 살펴보았으며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상이 서로 다른 지평에서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진정한 존재를 회복함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한다.

하지만 여러 개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세부 이론을 살핀다면 불교와 정신분석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본 논문이 필자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교의 세부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 다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정신분석 관점에 경도된 과도한 단순화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아직 정신분석과 불교의 관계에 대해 심화된 많은 연구들이 없음을 감안할 때 양자의 사상을 욕망개념을 중심으로 비교하면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보여준 연구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양자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유식불교와 정신분석의 무의식 개념, 공과 실재에 대한 개념, 불교의 수행과 정신분석의 치료 등 향후 연구를 통해 조명해야 할 주제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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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834

 

김석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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