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다실
상태바
불광 다실
  • 관리자
  • 승인 2007.10.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더위도 이젠 막바지. 수은주는 30도에 걸려서 내려올 줄 모른다. 벽돌 속 도시인들을 온통 산으로 물로 내달음질 치게 하는 이즈음이다. 그래서 태허를 안고 태양을 마시고, 대지에 젖어 들어 태초인간의 호흡을 알게 하는 여름이 만물을 키우고 성숙시키는 산실인가 생각해 본다. 진정 이 태양의 계절이 우리의 번뇌의 불집을 불사르고 진실 청정보리과를 여물게 하는 계절이기를 빈다.

  오는 20일은 (음7월15일) 선가의 해하일(解夏日)이다. 포도송이 알알에 감로가 고여들 듯 대지의 송가를 가득 담은 환희의 여름을 수확하는 날이다.

  지난 90일 동안의 쉴 사이 없는 풀무질, 불꽃튀는 망치질, 선사의 뜨거운 자비의 손길은 납자의 온 몸을 금강신으로 바꿨으리라. 노고를 치하하고 승리의 안거 성만을 축하한다. 오(悟), 미오(未悟)란 본래 없는 것. 정진이 득력이고 보은이고 다시없는 중생제도다. 온 형제와 함께 법륜대전(法輪大轉)을 기뻐하는 바이다.

  ♣ 사람은 혼자 살고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비로소「우리」또는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이 눈을 뜨고 또 하나의 자기를 인식한다. 평소에는 그저 육체적 몸뚱이가 독립해서 사는 것인 양 생각을 고집하고 집요하게 자유라는 이름 밑에 이웃과 공동체에 대하여 자기의 독자적 권위를 내세운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개아를 둘러싸고 있는 정신적 사회적, 집단이 과연 인간의 성장과 대립하는 것일까? 또한 사회적, 정신적, 공동체적 장치나 의식구조가 개아의 원만한 성숙과 개인의 구경(究竟)의 자유에 대각적 관계에 서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의 모색은 잠시 정지하기로 하고,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우리의 개인적 안정의 토대는 아무래도 가정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묵은 술도, 감각의 조율로도, 개아의 깊이에 잠들고 있는 혼을 달래고 잠재워 주지는 못한다. 바꿔 말하면 가정의 파괴 다음에는 다시 어떤 승리도 성공도 개아의 행복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 뿐인가. 더 나아가 국가가 망하고 겨레가 망했을 때 개인이 이룩한 성공과 업적이 어떤 것일까? 조국을 지키지 못한 성공이나 승리는, 그것은 망국민족의 애수의 장을 보태는 구실밖에 안 되는 것을 어찌할까?

  우리의 현실적 개아는 극히 정신적이며, 극히 사회적이며 극히 다변적인 부합성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아를 둘러싼 집단은 그것이 개아를 떠난 독자적인 것은 아니로되, 개아 또한 집단과의 동일성을 통해서 꾸준히 자기 내용을 확충해 나가는 것이다.

  집단적 동일성의 요구가 화려하게 긍정되고 미화되는 것을 보고 자유주의적인, 의식생활에 젖은 사람은, 그러한 집단적 동일성 앞에 대립되는 개아를 인식하며, 그 개아가 집단에의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받아들여지는 억압과 손실에 대하여 항거하고 나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집단과 개아 사이에 상호발전성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아야하겠으며, 집단동일성에의 참가가 동시에 자기동일성의 주장실현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동일성과 개인적 동일성이 상호 발전적인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구 자유주의의 공기에서 자란 의식층들은 곧잘 망각하는 것 같다. 우리들 자신이 나라를 잃고, 겨레가 이민족의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는 개아도, 가정도, 사업체도, 겨레의 자유를 위해서는 언제나 쾌히 버리고 나서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했다. 그런데 조국이 해방을 보고 광복의 가도로 달려오면서 생활과 환경이 너그러워지며 윤택해 가면서 우리는 개아의 참된 동일성의 의미를 망각한 사태를 곧잘 빚었던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부의 획득 그 존속 확장, 권익의 보장을 위해서 온갖 기치와 구실을 내걸고는 우리의 밝은 얼굴에 먹칠을 했다. 개인과 자유를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를 개아의 신성과 자유의 이름으로 얼마나 방탕하게 남용했던가?

  실로 하나도 독립적 대립관계는 없는 것이다. 모두는 시간적, 공간적 상호 상관 관계에 있으며 같은 원리를 자기 원리로 삼고 산다. 그리고 이들 관계 속에 모든 것은 필경 하나이며, 절대적 독존인 이름 부칠 수 없는 한 물건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벌어지고, 이루어진다. 부처님의 법은 이 사실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오늘의 생활 위에서 얼마나 이 가르침을 행하고 있는가?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